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퇴근을 약 두 시간 정도 앞두고 있던 터였다. Y와 나는 각자의 위치에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맞이하게 된 근무 마지막 날을 나름 충실하게 보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잘릴만해서 잘렸다"라는 평가를 듣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내가 별다른 기색 없이 일만 하는 모습마저 불만이었던 것 같았다. 별안간 씩씩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가던 K는 어느새 다시 내 앞에 다가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짐 챙겨서 나가세요. 점장님 지시입니다."
그녀가 당돌하게 선언한 후에 뒤돌아 욕지거리를 내뱉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놀랍기보단 마지막까지 빠짐없이 부들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애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당연히 기분은 불쾌했지만 나는 더 이상 수준 떨어지는 그녀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멀리서 나와 같은 그녀의 지시를 듣고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하며 분노 조절이 안 되는 Y가 보였다. Y는 당장 손에 쥐고 있던 옷을 내팽개치고 큰 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앞장서 짐을 챙기러 갔다.
직원들이 짐을 보관하는 장소는 점장실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짐을 챙기러 가는 길에 열린 문틈으로 점장이 자리에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해고 통보를 받은 날 근무시간도 다 채우지 못한 채 쫓겨나는 것이 억울한 것보다 그걸 지시한 사람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가 더 궁금했다. 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Y에게 명찰을 달라고 한 뒤 나는 점장실 문을 노크했다.
"점장님. 지금 당장 나가라고 전달받았는데 맞나요?"
"네. 지금 짐 챙겨서 나가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명찰은 여기에 두면 될까요?"
"그러도록 하세요~"
"네.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바로 잠깐 전에 직원을 내쫓았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온화한 미소를 끝까지 잃지 않던 점장과 그걸 웃으며 받아치던 나의 모습. 그것은 가히 삼류 스릴러 영화 속 한 장면으로 쓰기에도 손색없었을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어쩌면 나의 연기적 재능이 이때부터 빛을 발했는지도 모르겠다.) 점장 역시도 연기 천재 직원을 둔 직장 상사라서 그런지 나와 견줄만한 대단한 연기적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시간, 진짜 괴물급 연기 천재는 아래층에서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짐을 챙겨 일층 매장으로 내려왔을 때 순간적으로 멀리 있던 K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K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또박또박하게, 나를 바라보면서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었다.
뭘 X라봐. XXX아.
밑바닥 모습까지 다 까발려진 K의 마지막 도발에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던 나는 그 도발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뭐? 뭘 X라봐 XXX아? 그래, 좀 X라봤다 XXX아. 왜, 쳐다보는 것도 죄냐? 네가 뭐 얼마나 대단한 회사 다닌답시고 유세를 떠는지 모르겠는데 여기가 뭐 삼성이냐, CJ냐? 어디 같잖은 게 뭐 대기업이라도 다니는 줄 아나 본데 내가 나간다 내가 나가. 길 막지나 마 XX아."
일층 매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린 내 목소리에 근무하고 있던 동료들과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순간 내가 부끄럽지도, 그렇다고 자랑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그날 나의 기분과 상황을 하나도 배려해주지 않는 회사와 동료를 더 이상 배려해 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 뒤통수를 친 사람 면전에 시원하게 욕이라도 좀 날려줘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상대가 먼저 울고 싶은 사람 뺨을 때린 격이었다. 그래서 시원한 욕을 날릴 구실을 만들어 준 K가 오히려 고마웠다.
그렇게 짐을 챙겨 나온 우리는 근처 카페에서 동료들이 퇴근하길 기다리다 함께 술집으로 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날은 분기별로 한 번 있는 전체 회식 날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미리 회식에 빠진다고 말하지 않은 이상은 회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곧 우리와 술을 먹으러 가는 거라고 인식이 될 터였다. 그게 겁이 났던 동료들은 결국 우리에게 등을 돌렸고, 그중엔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T도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T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Y와 친했던 J는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퇴근하자마자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날의 일에 대해 깊은 공감과 위로를 전해주며 격분상태에 있던 우리의 감정을 위로해 주었다. 힘든 일을 겪을 때 인간관계가 정리된다고 했던가. 한낱 취준생일 때 만난 나와 Y와 J의 인연은 그들이 취직을 하고 경력을 쌓아 더 좋은 곳으로 두 번 이직한 지금까지도 끈끈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