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베트남에서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기간은 2주였다. 하노이에서부터 시작해 하이퐁, 깟바섬, 다낭, 달랏, 나트랑을 거쳐 호치민까지 이르렀을 때 나에게 주어진 2주라는 시간은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다음 나라로 넘어갈 계획을 세워야 했다. 나는 베트남을 시작으로 주변에 위치한 동남아 국가들을 모두 육로로 이동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도시인 호치민에서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넘어가는 버스를 예약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수요 감소와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가격이 많이 올라 버스비 60달러에 비자발급비용 45달러, 총 한화 13만 원 남짓한 돈이 소요되었지만 그마저도 비행기로 이동하는 것보단 저렴한 금액이었기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호치민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직접 버스회사 사무실에 방문해 버스를 예약했다. 다음날, 버스에 탑승하기 전에 결제를 하기 위해 나는 일찍이 그곳으로 향했는데 그곳에 있던 직원이 예약을 확인해 보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내 이름으로 예약된 좌석은 없다고 하는 거였다. 나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내 예약을 도와줬던 직원은 보이지가 않았고 그곳에 있던 직원들 중엔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되는 사람도 없었다. 오늘이 베트남에 도착한 지 딱 2주가 되는 날이었기에 오늘 베트남을 떠나지 않으면 나는 그대로 불법체류자가 될 판이었다. 그때 퍼뜩 어제 버스를 예약할 때 아무런 종이도 주지 않은 게 미심쩍어 핸드폰으로 예약서류를 찍어둔 게 생각이 났다. 나는 그 사진을 바로 직원에게 보여주었고 그들끼리 잠시 상의를 하는가 싶더니 이내 내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따질 정신도 없이 오늘 베트남을 떠날 수 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이번에는 결제 때문에 또 문제가 생기고야 말았다.
어제 예약할 때만 해도 달러를 기준으로 가격을 안내받았고, 나 또한 달러로 결제할 예정이라고 말을 했었기 때문에 나는 달러로 결제하는 데에 문제가 생길 거라곤 추호도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내가 결제를 위해 달러를 꺼내자 그들은 당황하는 듯하더니 달러는 잔돈이 없으니 베트남돈으로만 거슬러 줄 수 있다고 하는 거였다. 내가 지금 베트남을 떠나는 마당에 베트남돈으로 잔돈을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따지고 들자 그들도 다른 방법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달러로 결제하고 베트남돈으로 거스름돈을 돌려받게 되면 어리숙한 외국인인 나에게 환율도 불리하게 적용할 게 뻔했다. 나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며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아서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결국 보다 못한 승객 중 한 명이 본인이 가지고 있던 달러를 나에게 주면서 그 소동은 일단락될 수 있었지만, 버스를 타기 전부터 생각지도 못한 말싸움을 계속하고 나니 이미 기운이 다 빠져서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 졌다.
버스에 타서 얼마 되지 않아 가이드 같은 포지션의 아저씨가 돌아다니며 승객들의 여권과 돈을 걷기 시작했다. 나에겐 아까 버스비를 내고 거슬러 받은 40 달러가 있었지만 비자비를 하기엔 5달러가 부족했기에 다시 100달러짜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나의 100달러를 가져간 아저씨는 모든 승객의 여권을 다 걷고 비자비까지 다 받았으면서도 나에게 거스름돈을 주질 않았다. 아저씨가 직접 주길 기다리다 지친 나는 아저씨가 계신 곳으로 가서 번역기로 돈을 거슬러 달라고 요청했고, 아저씨도 번역기로 뭐라고 적으며 나에게 보여줬지만 번역이 엉망이라 나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내 여권과 마지막 남은 100달러짜리는 이제 그 아저씨의 앞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나는 이제 그 아저씨가 착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버스는 한참을 달려 캄보디아 국경에 도착했다. 우리는 한 명씩 모두 내려 출입국 사무소에서 검사를 받고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아직 여권도 돌려받지 못했는데 버스는 우리를 태우고 어디론가로 향하더니 별안간 큰 식당 앞에서 모든 사람들을 내려줬다. 지도상으로 나는 이미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 안에 들어와 있는데 아직 비자도 받지 못했고 여권도 받지 못한 채로 여기서 밥을 먹어야 했다. '순서가 이게 맞나?'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같이 탑승했던 승객들이 하는 대로 나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밥 생각도 따로 없어서 아예 먹지 말까 고민하고 있었더니 아까 버스회사 사무실에서 나를 도와줬던 현지인이 굳이 나를 챙기면서 밥을 사주겠다는 게 아닌가. 못 이긴 척 받아먹은 그 밥은 안 먹었으면 길이길이 후회했을 정도로 맛있었다. 그의 호의가 고마워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아저씨는 사람들에게 여권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비자가 붙은 여권과 잔돈을 거슬러 받은 나는 그제야 마음을 조금 놓을 수가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사람들을 태우고 출발한 버스는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계속 달렸고 우리는 버스를 탄지 장장 9시간 만에 드디어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나는 나를 여러 방면으로 도와줬던 현지인 아저씨에게 마지막으로 감사인사를 전하고 바로 호스텔로 이동해 지친 몸을 뉘었다. 생에 처음으로 해 본 육로로 국경 넘기는 생각보다도 고됐다.
다음 날은 캄보디아인인 대학 동창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내가 중국에서 유학할 때 같이 어울려 지내던 외국인 친구들은 대부분 동남아인이었는데, 해외에서 유학을 하는 친구들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동남아인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다들 자기 나라에서 방귀깨나 뀌는 좋은 집안 출신인 친구들이 많았다. 이 날 만나기로 한 캄보디아인 친구 유리 또한 그랬는데, 평소에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삐까뻔쩍한 명품과 보석들을 두르고 다니는 걸 보면 그도 보통 부잣집 출신은 아닌 것 같았다. 얄궂은 친구들이 유리가 나에게 잠깐 호감을 가졌던 걸 알고는 커플처럼 엮으며 장난을 치곤 했었는데, 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한참 동안 연락이 없었기에 그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조금 기대가 되기도 했었다.
오랜만에 만난 유리는 여전했다. 아니, 겉으로는 여전했지만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게 느껴졌다. 예전의 그는 겉으로는 허세를 부리고 장난기가 많아 보여도 속은 정이 많고 다정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는 학생을 벗어난 사회인이 되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훨씬 가식적이라는 느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가 여행객으로 이곳에 온 나를 본인의 집에 초대해 재워주는 것까지 해주기를 기대하진 않았어도 집구경이나 가족 소개정도는 해줄 줄 알았는데, 그는 나를 정말 오랜만에 본 먼 친구 대하듯 밥 한 끼 사주고 다시 나를 숙소로 돌려보냈던 것이었다. 그가 정말 바빠서였을 수도 있고, 그날따라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 그에 대한 솔직한 얘기만 해줬어도 나는 덜 서운했을 텐데 그는 알게 모르게 나에게 벽을 치는 느낌이어서 그게 못내 더 서운했다. 2주 전에 만났던 베트남인 친구가 나를 극진히 대접해 줬던 것과 비교가 되어서 더 그렇게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밥을 먹는 동안 그와 그의 가족들이 무슨 일을 하기에 이렇게 돈이 많은지 은근히 궁금했던 나는 그에게 솔직하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의 집안이 할아버지 때부터 해오던 가족사업을 이어서 해오고 있다고 했다. 그 가족사업이란 아버지 쪽은 부동산 관련 일을 하시고, 어머니 쪽 집안은 정치 쪽과 연이 깊어서 가족이 다 같이 부동산 및 개발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캄보디아에서 법대를 나오고 중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마쳤던 유리는 주로 중국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과 법률 쪽 일을 담당한다고 했다. 고객을 응대하는 일이 주로 술자리와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일 술을 먹는 게 요즘 가장 힘든 점이라고도 했다. 그의 가족의 일주일치 식비가 우리나라 직장인 평균 월급에 맞먹고, 매일 이곳저곳 호화스러운 쇼핑여행을 다닌다는 여동생의 이야기까지 들으니 나는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그는 나중에 집안에서 정해준 비슷한 레벨의 자제와 정략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게 바로 그사세구나 싶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프놈펜의 이모저모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이곳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동네는 어디이고 땅값은 얼마이고 집값은 얼마이고 생활비는 어느 정도라는 이야기까지. 아마 캄보디아라는 나라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기 위해 가장 자랑하고 싶었던 부분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의 이야기를 통해 '캄보디아에 잘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런 깨달음이 있을수록 이상한 반감이 들었다. 이 기시감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잘 생각을 해봐도 내 기분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숙소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언가 짐작 가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오늘 저녁 유리를 만나기 전에 낮시간동안 홀로 프놈펜을 돌아다니며 봤던 광경과 그에게서 들었던 내용들이 너무 이질감이 든다는 거였다. 그 비싼 집과 돈 많은 부자들이 사는 이 도시 프놈펜에는 판자로 집을 짓고 움막 같은 가게에서 물건을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프놈펜의 실제 모습일지도, 사실은 유리가 감추고 싶어 했던 진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 기시감의 원인이었던 것이었다.
호치민에서 캄보디아로 넘어오는 버스 안에서 캄보디아 국경을 넘자마자 차가 너무 막히는 바람에 나는 놀라운 장면들을 많이 목격할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 수입한 중고차들을 포함한 폐차급의 차량들이 눈에 띄게 많이 늘었고, 앉을 틈도 없이 빽빽하게 세운 채로 사람들을 가득 채운 트럭들은 짐승 나르듯이 사람들을 나르고 있었다. '같은 동남아 국가인데도 차이가 많이 나는구나...' 같은 생각을 하던 찰나 창문을 뚫고 누군가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웃음인지를 추적했더니 비를 막아주는 천장도 없어서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트럭에 실려가던 어떤 아주머니들이었다. 그 트럭은 사람이 많이 타지 않아 자리 여유가 좀 있었는지 같이 이동하는 사람끼리 동그랗게 앉아 무언가를 나눠 먹고 있는 것 같았는데 하나같이 다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자지러지듯이 웃고 있는 거였다.
그 별 거 아닌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삶이 불쌍하다고 동정하고 있었던 것을 깨달은 거였다. 작고 소소한 일상에서도 행복감을 느끼고 때 묻지 않은 얼굴로 환하게 웃는 사람들을 보니 내가 했던 독단적인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감히 내가 뭐라고 타인의 삶을 동정하고 내 잣대에 맞춰 가엽게 느꼈던 건지 나는 다시 한번 자기중심적이었던 나의 삶의 태도에 대해 깊이 반성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비싼 밥을 먹고 비싼 술을 마시며 비싼 차를 타고 비싼 집에서 사는 그가 정말로 행복한지. 집안에서 정해주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평생을 함께 하는 것에 만족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내가 감히 꿈꿔보기도 힘든 삶을 사는 그를 내가 뭐라고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누가 나에게 '가진 게 많아서 행복한 삶'과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한 삶'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고민 없이 후자를 선택할 것 같다는 거였다. 조건이 있어서 행복한 삶은 영원할 수 없다. 진정한 행복의 가치는 내 밖에서가 아닌 내 안에서 찾는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