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잎을 땄다. 가시가 꼭 박혔다. 겉으로 봐서는 송글송글 솜털 같은데 꺽을때 손에 힘을 주니 따끔하다. 잠시 묻어져 보이지 않았던 슬픔이 보이지 않은 가시로 아렸다.
호박잎을 따다 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기 전 하늘은 맑고 곱고 광활했다. 어딘가에 그대가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주변을 돌아보자 슬픔은 더욱 선명해졌다. 굵은 손으로 감자 캐던 그 모습, 겨울이 시작되던 이른 새벽 맞지 않은 고무장갑을 끼고 열심히 배추를 씻었던 모습, 아이들과 물놀이한다고 호수로 물을 마구 쏟아대던 장난꾸러기 그대, 명절만 되면 창고 한쪽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던 따스한 손길 등이 떠올랐다. 20여 년 간 함께 살아온 부모님 집에는 너무 많은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이곳에 오기 싫었나 보다.
슬픔을 뒤로하고 다시 호박잎을 따는데 전념했다. 상처 입은 손가락은 이젠 무뎌졌다. 슬픔도 이렇게 무뎌지면 좋겠다. 한 손 가득 따고 가려는데 환한 웃음을 띄고 큰아들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가볍지만 오늘만큼은 가볍지 않은 광주리를 들어주었다. 이제 성인이 된 아들은 어느새 아버지보다 더 커졌다. 지는 하늘을 담으려 옥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하늘 가득 붉은빛으로 찬란할 때 옥상에 오르던 그의 발길이 떠올랐다. 아들의 아버지는 과거였고 아들은 현재이자 미래이다.
호박잎과 김치를 가득 실고 친구 집에 놀러 간 막내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정성이 가득한 음식들도 현재의 내가 잘 살아내길 바라는 마음이며, 아들의 굵은 목소리도 사춘기가 계속 진행 중이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잠시 슬픔을 뒤로하고 현재를 살아야 한다. 과거의 기억들에도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듯이 현재의 삶도 미래의 삶도 함께 할 것이다.
앞으로도 많은 이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별은 슬픔이며 과거의 빛은 바랬지만 기쁨으로 저장되어 있으며 현재의 삶에 거듭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빠가 없는 아이들의 마음속 빈자리는 슬픔이 차고 넘치지만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며, 현재에도 그립다는 건 존재는 없지만 존재한다는 것. 없다는 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이어져 닮아 있는 모습과 습관들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삶을 살겠지만 아빠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아빠는 그 누구보다 아이들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처럼 자랑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다.
가져온 호박잎을 찜기에 바로 쪄 놓았다. 날 선 가시로 힘껏 위협하던 가시가 몽땅 사라졌고 한껏 풀이 죽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났다. 슬픔이 가시처럼 나를 아프게 했지만 그 고통으로 또 삶을 배웠다. 유들유들 부드러워졌다. 웬만한 어려움도 웃으면서 살아낼 것이다. 과거와 현재, 슬픔과 기쁨이 따로 똑같다는 것을 아주 조금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