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비 Sep 26. 2020

꽃처럼 예쁜 스승들

코스모스를 닮은 아이들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흔들, 그 가벼운 몸짓이 곧 날개를 펴 하늘로 날아갈 것 같다.

코스모스와 닮은 아이들.

아이들도 코스모스처럼 수많은 환경에서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하루도 참 길었다. 아침에 드디어 마지막 긴급 돌봄을 갔다. 다음 주부터는 정상 등교. 집 가까운 초등학교에서 코로나로 오전 긴급돌봄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3주동안 학교에 출근했다.


잠시나마 학교에서의 일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주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1.2학년들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 명 한 명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이 깊었다.

루의 반을 차지했던 아이들과의 일상이  마무리 되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 나도 아이들도 잊을 것이다.

내가 없는 일상의 시간들도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은 내가 드디어 울먹였다.

나의 한계가 드러났고 나의 연약한 부분들이 여지없이 공개되고 말았다.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안 하는 아이들. 청소를 하라고 해도 어느 순간 빠져나가는 아이.

한 아이를 가르치고 있는데 자신의 연필이 사라졌다고 찾아내 달라며 어깃장을 놓는 K. 나를 발로 찬다. 자기 성질에 못 이겨 계속 나를 때린다. 그만하라고 해도 씩씩 대며 콧김을 계속 내뿜는다.

다른 친구들이 그만하라고 해도 멈추지 않고 도리어 그 아이들을 때린다. 결국 지나가던 담임선생님이 왔고 K는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반 아이들이 K가 싫다고 한다. 소리를 지르며 싫다고 한다. 나에게 지나온 과거의 행적들에 대해 이르고 또 이른다. 담임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갔던 K는 들어와 한동안 차분해졌다가 어느 순간 또 화를 내며 의자를 들고 공격적인 태도로 위협을 하고 또 발로 찬다. 분이 풀릴 때까지 씩씩거린다. 어이없는 건 의자를 막상 들고는 무겁다며 바로 내려놓고 나를 보고 금방 헤헤거린다. 의자를 아무 데나 놓고 놀러 나간다. 나보고 치우라는 것이다. 그냥 어이없어 웃었다. 실제로 의자를 던지지는 못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제스처만 취한다.  

     

K는 놀러 나가고 다른 아이들은 클레이로 만들기를 한다고 한다. 점심 먹고 와서 하면 안 될까? 했는데 이미 꺼내서 만들기 시작했다. 점심 먹으러 가기 전에 청소가 되어 있어야 한다. 청소를 안 하면 다음 돌봄 교실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완벽하게 청소가 돼야 한다. 클레이가 책상 위에 더덕더덕. 바닥에도 들러붙었다.

한숨만 나왔고 드디어 내가 울먹였다.

"얘들아. 다음 시간에 다른 선생님이 오시는데 깨끗하지 않으면 싫어한 말아야. 제발 그만하고 치워줘라"

다음 선생님의 성향을 잘 알기에 급기야는 터져버렸다. 좀 더 지혜롭게 말할  후회가 되었다.   

     


선생님 한분이 지나가다 들어와서 "힘드시죠? 반에서는 이렇게까지 흐트러지지 않아요. 적절히 통제가 되죠.

자신들을 항상 지도해주시는 담당 선생님이 아니니 더 말을 안 들었을 거예요. 좀 더 자유롭기도 하고. 두 반이 섞이면서 더 힘드셨을 거예요."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셨다.

그렇다. 아이들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편 것이다. 통제도 적도 자유로우니 더 활발했고 공격성과 참을성 없음이 마구 마구 나왔던 것이다.   

   

선생님들의 역할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전에는 이렇게까지 힘들 줄 몰랐다. 좋은 직업이며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으로는 최고라고만 생각했었다.

적게는 한두 명부터 많게는 20.30명이 넘는 숫자의 아이들을 인성. 학습. 중재. 발달 등등 많은 부분들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고 요즘 아이들처럼 다양한 욕구를 갖은 아이들을 다룬다는 건 너무 어렵고 에너지 소모도 대단히 크며 예전보다 학교에 기대는 역할이 너무 많이 커졌다.    

 

아이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다거나, 아이가 혼자 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앞서서 챙겨준다거나, 또한 너무 바빠 아이의 욕구를 알지 못하는 과잉보호나 결핍의 육아를 하는 부모들이 많다는 건 시대가 변해도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아이들은 어른들에 비하면 단순해서 마냥 천진난만하고 행복하기만 하는 줄 알았다.

아이들도 행복할 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있고 친구들이 놀이에 끼워주지 않으면 외로움을 느낀다. 학습이 안되면 스스로 답답해서 울기도 한다. 외롭고 함께 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집에서처럼 떼를 쓰거나 억지를 부리는 거친 행동을 하고,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싫어하면 또 과잉행동으로 무한 반복이다.

이 아이는 언제쯤 마음 안에 있는 문제들이 풀릴까? 언제쯤이면 친구들과 관계를 잘할 수 있을까?

학습이 안 되는 아이들은 언제쯤이면 다른 친구들처럼 잘하는 모습을 스스로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제발 못한다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의 세상은 어른의 축소판이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힘들다. 단지 말하지 않을 뿐. 아니 말은 언제나 하고 있는데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 바빠서, 힘들어서 아이들을 볼 겨를이 없다.

그 공백만큼 아이는 학교에서 힘들다. 매우.

그 힘을 잘 극복하면 좋지만 극복하지 못하면 스스로 실패자라고 느껴져 열등감을 갖는다.

열등감은 자아존중감을 떨어뜨려 세상 안의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매우 힘들다.     

     

아이들의 어릴 때가 얼마나 중요한지. 영, 유아. 아동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정신 병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주 양육자가 아이들은 포기하지 말고 그 눈을 바라보고 원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또 알아야 한다.    


아이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아이들에게 어른이라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 안 된다는 것을.

지혜롭고 현명한 어른을 아이들은 만나길 원하며 잘 가르치는 어른을 만나는 것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어른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가정 내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아이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다른 아이와 비교하면서 자신을 괴롭힐지 걱정이 된다. 너무 과잉보호하는 엄마는 조금 덜어내고 너무 관심이 없는 부모는 좀 더 관심을 준다면  균형이 맞고 질서도 유지되지 않을까?


아이들이 나를 힘들게 했더라도 사랑스럽고 귀엽다. 지금은 어른들을 힘들게 할지라도 몸이 성장하듯 마음도 성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인내심있게 지켜 줄 어른이 반드시 필요하다. 끝까지 가능성을 놓지 말아야 한다.


나도 분명히 그런 시절이 있었고 어리석고 미숙하며 한없이 연약했었다. 인내심있게 지켜봐준다면 그 시간만큼 어른들도 아이와 함께  성장할 것이다.

나도 아이들처럼 한없이 연약한 코스모스임을 깨닫는 귀한 시간이었다.

나를 좀 더 참을성 있는 어른이 되라고 한다.

오히려 아이들이 어른들의 스승이다. 꽃처럼 예쁜 스승들.                          









작가의 이전글 꼬마와 함께 한 선물 같은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