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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Sep 20. 2020

꼬마와 함께 한 선물 같은 하루

깨진 보도블록에 비추인 설렘.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비가 내렸는데 갑자기 잦아들더니 완전히 해가 쨍하고 떴다. 오랜만에 나온 햇빛도 쬘 겸 9살 꼬마 조카와 아이스크림을 사러 마트에 갔다.

하지만 몇 분 채 안 걸었는데 온몸에서 땀이 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해도 오랜만에 나왔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기라고 하는 것처럼 아주 뜨거운 빛을 가감 없이 쏟아내고 있다.


조카는 "이모 언제 나와? 아직 멀었어?"라며 자꾸 물어본다. 사실 우리가 걸은 건 5분 정도 밖에는 안되었지만 너무 덥고 습해서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햇빛을 쬐 나왔지만 이제는 도망가야 할 정도로 뜨거워 우리는 잠시 그늘이 있는 학교 놀이터로 갔다. 역시 오랜만에 인간들이 왔다고 미친 듯이 모기들이 공격하는 바람에 우리는 또 도망 나와 그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우리는 도망자 신세 같았다.


왜 오늘따라 이 길은 멀게만 느껴지는지. 조카에게 살짝 미안해지려고 했다. 다행히 조금 더 걸으니 중학교가 나왔다. 풀이 무성한 화단 안에 있는 학교 연못도 구경하고 연못 안에 개구리가 우리를 반기는 바람에 약간의 힘듬이 사라졌고 조카도 즐거워했다.

다행이었다. 반기는 개구리에게 힘을 얻고 좀 더  걸으니 어느새 농협 하나로 마트에 도착했다.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는 너무 시원해서 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우리는 아주 여기서 살고 싶다고 얘기하며 웃었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입에 물고 우리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하나로 마트를 나와 조금 걸으니 보도블록이 깨진 곳이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다 순간 그 모습이 구름 같아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구름 모양 안에 빗물이 고여있었는데 작은 연못 같았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파란 하늘도, 하얀 구름도 전깃줄도 보이는 것이였다. 

깨진 보도블럭 세상은
가장 작은 연못이다.

작은 연못 세상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깨진 보도블록 연못이지만 그곳 세상에도 구름이 지나가고 작고 귀여운 새도, 바람이 지나가며 비행기가 지나갈 것이다. 투명하고 맑은 하늘이 거울처럼 비춘다.

세상은 공평하다. 비출 수 있는 곳 어느 곳이든 찾아간다. 단지 그 빛을 알아보는 사람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내가 만나는 마음이 아픈 많은 이들도 어쩌면 자신을 깨진 유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깨진 유리 안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더 많은 이야기가 거울처럼 나를 비치고 있는지를 모른다.

상담은 깨진 유리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깨지고 상처 난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연못은 내 마음같다. 세상에서 가장 위축되었고 가장 작게 느껴졌던 수많은 날들과 닮았다.

산산히 조각날 정도로 힘든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깨졌기 때문에 수많은 하늘이 지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내 마음이 깨졌기 때문에 수많은 나와 만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않은 수많은 감정을 알았으며 그런 나를 인정하니 확실히 그 전보다 다른 사람을 이해의 폭이 넓어진것 같다.
고통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이후에 따라오는 선물 같은 인생은 분명 찾아온다.


9살 조카와 함께 한소중하고 아름다운 한 순간이 나의 마음의 한 조각으로 남겨질 것이며 비록 덥고 힘들었지만 오고 가는 다정한 말에서, 잠깐이지만 함께 한 경험들이 조카의 마음에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되길 바랄 뿐이다. 나도 조카에게도 이런 날들이 모아진다면 분명 인생은 선물이 될 것이다.


깨진 보도블록이 고운 아이의 마음과 나의 마음을 투명하게 비친 날들의 셀렘이 감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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