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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기댈 곳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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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Oct 05. 2022

취향: 아들의 핑크색 망사 드레스



취향(趣向):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정부가 국민 모두에게 지급하는 코로나 재난지원금이다. 누군가는 미용실 다녀오니 사라졌다고 하고, 누군가는 가족 외식하니 사라졌다고 한다. 나는 이 재난지원금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생각하던 중에 계획하지 않은 소비를 했다. 이미 몇 년 전 이야기이지만 살포시 꺼내보려 한다.




여름이  도착했을 무렵이다. 옷을 먼저 사달라고  적이 없던 5세와 길을 걷고 있었다. 병원을 가거나, 떡집을 가거나, 음식점을   항상 지나가던 길이었다.  날도 어김없이 집으로 향하는 신호등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동복 가게를 지나가자마자 호제가 외쳤다.


“아, 맞다!”

‘(잉?)’

“엄마, 우리 옷 사야지!”

‘(응? 우리가 옷을 사야 된다고?)’


주야장천 파란 색깔 2-3개 옷과 경찰옷을 번갈아 입으며 등원하던 호제였다. 주말에만 다른 색깔 옷을 입었다. 그래서 옷값이 거의 들지 않았던 때였다. 그런 호제가 옷을 사달라고 얘기하니, 반가운 마음이었다.


“오 그래?! 그래, 사러 가자!”


드디어 옷도 대보고 원하는 옷을 사보는구나 싶어 기쁜 마음으로 아동복 가게로 들어갔다. 유리창 전면에는 원피스와 남자 위아래 아동 정장이 걸려있었다. 마네킹은 신상 여름옷을 입고 서 있었다. 나는 남아용 바지와 티셔츠를 골라 이 옷은 어떤지, 저 옷은 어떤지 물었다. 호제는 모두 싫다고 했다.


“나 저 옷 사고 싶어.”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옷을 가리켰다.




호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옷은 핑크색 망사 드레스였다. 상체에는 핑크색 천 위에 스팽글이 전면에 달려온 사방으로 오색빛을 냈다. 하체는 핑크색 종모양 치마에 핑크색 망사가 한 바퀴 휙 둘러졌다. 종 모양 치마라 아주 풍성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다. 당황함을 나름 숨기고자 최대한 노력하며 말했다.


“아, 그렇구나. 그래 이것도 찜 해놓고 다른 것도 보자!”


다른 옷도 권했다. 이건 어때, 저건 어때. 정말 사고 싶은 거 딱 하나만 골라보라고 했다.


“저거!!!!”


핑크색 망사 드레스였다.






“그래! 사자! 이왕이면 양말도 살까?”

흰색 레이스 양말도 집어 들었다.


핑크색 망사 드레스와 흰색 레이스 양말. 완벽한 조합이다. 결제하면서 아동복 사장이 말했다.


“이야, 엄마 잘 만난 줄 알아. 이런 엄마 흔치 않다.”

“하하하하하. 고맙습니다.”


옷이 든 가방을 건네받았다. 한 손에는 핑크색 망사 원피스와 흰색 레이스 양말이 든 가방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호제 손을 꼭 잡았다. 인사를 드리고 아동복 상점 문을 열고 나왔다. 은은한 더움이 얼굴을 스쳤다.


“호제가 이 옷을 사고 싶었었구나.”

“응. 엄마. 나도 예쁜 거 좋아해.”

“그럼, 예쁜 거 누구나 좋아하지. 앞으로도 예쁜 거 보이면 얘기해줘.”






이렇게 말은 했지만, 나의 마음은 오묘해졌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집으로 오자마자 새로 산 옷으로 갈아입었다. 빙글빙글 돌며 종모양 치마를 부풀렸다 가라앉혔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호제는 소파에 앉아 자신이 한껏 귀여워 보이는 갖은 표정과 포즈를 취했다. 발레리나가 되기도 하고, 겨울왕국의 엘사가 되기도 했다. 나는 안나 역이었다. 이 순간을 놓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신나게 놀았으나 여러 마음과 생각이 교차했다. 익숙하지 않은 이 느낌은 나의 이중성을 코앞에 두고 온전히 직면하기 전의 불안과 두려움, 부조화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들의 취향을 존중한 듯 행동했지만, 내 의식 속 어디인가에는 불안함이 샘솟고 있었다.






내가 여성성을 증폭시키는 건 아닐까? 여성성이 좀 증폭되면 어때? 동성애는 누가 만든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잖아? 그저 다름으로 바라봤던 나는 어디에 있나? 동성애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다녔잖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구분이 필요하냐고 생각했잖아? 남자도 치마를 좀 입어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던 나는 어디 있나? 나도 아빠 양복 입고 사진을 찍어댔잖아? 나는 남자 옷을 사달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내 자식 앞에서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아지지?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아이의 행복보다 내가 감당해내야 하는 어려움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여러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거였다. 아이의 삶을 존중하겠다면 서도 나의 시선과 나의 행복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나의 편의와 사회적 시선 때문에 아이의 행복을 눈감고 아이에게 강요하지 않겠다고 그렇게나 다짐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언젠가 또다시 아이의 관심과 행복이 아닌 나의 편의와 사회적 시선 때문에 아이에게 강요하는 순간이 온다면, 이 기록을 잊지 않고 펼쳐보길 바란다.




     


(에필로그)

몇 년이 지났지만 옷장에는 여전히 핑크 레이스 드레스가 있습니다. 글로 기록할 겸 핑크 레이스 드레스를 꺼내봤습니다. 이번에도 핑크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모델이 된 마냥 아름다운 포즈를 취합니다. 이번 기회에 호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핑크 레이스 드레스를 꼼꼼하게 살펴봤습니다. 소재도 만져보고, 스팽글에 빛도 비쳐보고, 치마에 바람도 불어보고요. ‘나도 예쁜 거 좋아해!’라는 말을 하게 만들었던 핑크 레이스 드레스를 여러분들께도 공개합니다!


짜잔!




나도 예쁜 거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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