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 같이 앉아 각자 숙제를 하던 어느 날 저녁, 호제가 묻는다.
“엄마! 세상에서 무시무시하고 가~~~장 크고, 없애야 하는 벌레가 뭐게???“
”응? 뭐지? 무시무시? 벌레? 바퀴벌레? 난 바퀴벌레 안 무서워하는데. 지네? 지네가 크진 않잖아. 뭘까?“
”대충!!!!“
답을 말한 호제도, 답을 들은 나도 같이 웃었다. “크으하하하하하하하“
대충 박멸작전을 시작했다.
내 눈에는 호제가 영어책 읽기 숙제를 너무 설렁설렁하는 것처럼 보이던 시절, 반복적으로 얘기했다.
“호제야, 책 읽을 때, 속도가 아니라 이해가 중요해.
다 읽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체 내용을 이해했는지가 중요하지. 더 들어가 세세한 중요한 요소들을 기억하러면 이해하며 차근차근 읽는 게 중요해.
읽으며 상상해 봐.”
책 종류에 따라 어떤 책은 빠져들지만, 어떤 책은 그림 중심으로 이해하며 글을 곁들이는 방식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다 하기 싫지만 해야 할 땐 페이지를 슝-슝- 넘기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속도가 아니라 이해!”, 내 마음이 과격해지면 “NO! 대충대충! 속도가 아니라 이해!“를 외쳤다.
(어후, 낯 부끄러워. 노! 대충대충! 뭐니.)
글씨체가 점점 휘날리는 모양새다. 글씨를 배우는 초반에는 과할 정도로 꽉 쥐고 꾹꾹 눌러쓰더니, 익숙해지니 글씨가 휘날린다. 수학문제는 자꾸 눈으로 풀려고 하고. 풀이과정을 쓰라고 하면 입이 삐죽 나온 채 괴발개발이다.
나의 성질머리에 장작이 하나둘 차곡차곡 쌓였다. 결국 자가 점화가 일어난다.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나의 인내력.
“호제야, 대충대충 하면 남는 게 없어. 아기 돼지 삼 형제 집에 벽돌집처럼 차근차근 쌓아보자.“
”싫은데~ 나 대충대충 할 건데~“
“대충대충 쌓으면 바람 불면 날아가는 집이랑 똑같아져. 대충도 습관이 돼. 착각하면 안 돼. 대충 하면 숙제 끝내서 만족할지 몰라도 알맹이가 없을 수도 있어.”
잔소리 들으며 자라는 아이 뇌라는 자료를 봤지만, 난 결국 잔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이후 가끔 호제는 영어책을 집어 들며 씨익 웃으며 말한다. ”대충대충 읽어야지~히히.“
나는 속으로 되뇐다.
‘낚이지 말자. 낚이지 말자.’
그리고 나는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는 듯 의연한 척하며 말한다.
”와, 재미겠다! 차근차근, 속도가 아니라 이해하며 읽어보자.“
대충은 시간의 밀도와 연결된다.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효과가 달라진다.
상훈 선생님께 스트레칭을 배운 날, 집에서도 똑같은 자세로 스트레칭을 하는데 왜 효과가 다른지 선생님께 되물었다.
선생님은 잠깐의 멈춤 시간을 갖고, 한 어절씩 느긋하게 꾹꾹 담아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대…충…”
‘대충’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번뜩 호제가 나에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선생님께 묻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벌레가 뭘까요?”
“대…충?“
”맞아요!“
”와…..“ 선생님은 나의 대충 드립에 말을 잇지 못했다.
대충대충 하며 있어 보이는 척하기에, 대충대충 하며 꽤나 많은 걸 했다고 착각하기에 좋은 미디어 환경 속에서 호제와 나는 오늘도 대충을 잡아볼 테다.
대충과 함께 살고 싶은 유혹이 지금도 꿈틀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