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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군 Feb 20. 2024

지하철에서 기억상실이 온 이유

치매 검사비는 하나도 아깝지가 않어~

*6년째 우울증을 돌봐오고 있고 어쩌다 전재산도 날렸지만 열심히 살아보려 노력하는 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약 6년 전의 일이다.


여느 날처럼 일상을 보내는데 일이 있어 미금역을 찾았다. 분명 지하철 나오는 출구까지는 잘 찍고 나왔다. 그런데 열 걸음도 채 움직이기도 전에 내 머리는 순식간에 완벽하게 멈추어버렸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 그래도 모르겠다.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식은땀이 나고 입이 미세하게 떨린다.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건지, 지금 몇 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그야말로 '셧다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짧은 몇 초 동안 나는 온 우주에 홀로 떨어진 것 같은 공포를 느껴버렸다. 이 찰나의 순간에도 혹시나 주변사람들이 내가 기억을 잃어버린걸 눈치챌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떨구어버렸다.


그렇게

15년 같은

15초간의 시간이 지났다..

(사실 그 시간이 15초 인지도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나의 짐작이다)


점차.. 적지 않은 시간 내에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고, 지금 여긴 미금역 안이고, 현재 무얼 하러 왔는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더 당혹스러웠던 건, 당시 내가 밟고 서 있던 미금역이 바로 내가 15년간 살았던 곳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진심,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다.


당시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결혼 준비로 퇴근 후에는 매일매일 야근을 하는 것과 같은 일상을 보냈다. 결혼을 세상 혼자 하는 것도 아닌데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날 괴롭히는 두 가지의 가장 큰 원인들이 있었다는 걸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끝없는 엄마의 종교 사랑

잠시 과거로 돌아가보자. 나는 태어날 때부터 특정 종교를 가진 부모님의 밑에서 태어났다 (뭐 내 글을 딱히 누가 주의 깊게 읽겠냐마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종교 이름은 비밀에 부치려 한다) 초등학교 3-4학년 때즈음 내가 다니던 종교가 여느 사람들이 익히 수긍하는 그런 종교와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사이비인지 이단인지 말들이 많은 종교 중 하나인 그곳을 남들이 뭐라 해도 나는 어린 시절 부지런히도 다녔다. 그러다 커서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눈을 가진 성인이 되었고, 특별히 종교를 곁에 두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교 때부터는 종교를 완전히 숨겨버렸다. 중고등학교 때 썩 기분 좋은 관심을 받았던 기억도 없고, 매번 종교를 설명하는 것도 (주목받는 것 같아) 창피하게 느껴지고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눈에 띄진 않지만 단체에서 어떤 기여를 하는 위치에 늘 있고 싶어 하셨고 당신은 그렇게 평생을 사셨다. 20여 년간 우리 집은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제법 장사가 곧잘 되었지만 남는 건 거의 없었다. 몹쓸 종교단체에서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붙여가며 재산을 야금야금 앗아간 것이다. 물론 이건 아빠의 주식사랑도 한몫을 하긴 했고, 달란다고 다 준 엄마의 종교사랑도 문제였지만, 자식들인 우리는 종교 탓이 컸노라고 여적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나의 결혼식' 때 엄마의 종교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끔찍이도 싫었던 거다. 이 스트레스가 결혼준비 스트레스와 맞물려 극에 달해버렸던 거다. '회사 사람들이 이 비밀을 알게 되면 끝이야, 대학교 친구들도 올 텐데 장난해?'라는 마음의 방이 끝도 없이 평수를 키워 나갔다. 이어 나는 그 어떤 종교의식도 비추어서는 안 된다며 엄마에게 엄포를 놓았다. 내 결혼식만큼은,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는 그 순간만큼은 내 발목을 끈질기게도 붙잡던 그 종교 따위가 범접하게 하기 싫었다. 다행히 결혼식은 내가 원하던 대로 조용히 치러졌다.


의외로 우리나라에 딱히 밝히고 싶지 않은 소수 종교를 갖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누가 종교를 묻는다면 무교라고 말을 하기도 하고 대충 얼버무리기도 한다. 뭐 누구나 비밀은 있다지만 이런 원치 않는 모태 비밀은 사양하고 싶다. 참 세상은 특이하고 별별 사건과 사연들이 가득하다는 말은 사실이다.


"도망쳐!!!!"


만약 부모님이나 특정인에게 종교나 불합리한 강요를 받고 있는 분들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자립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울 것을 권해드리고 싶다. 어떤 종교든 따르는 건 개인의 자유인데, 당사자가 아니라는데도 강요하는 건 말도 안 될뿐더러 지옥보다 더한 지옥이니 말이다. 참고로 그래서 언니도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얼른 시집을 가 버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역시 언니는 늘 현명하다.



인간관계는 나의 모든 것

문제는 종교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유년시절의 기억에는 아빠의 가정폭력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엄마와 우리 자매는 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아빠의 폭력은 나까지는 거쳐가진 않았지만 (나는 이때 비열하게도 아빠의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생존전략을 본능적으로 짜고 있었다. 지금도 이 부분이 참 수치스럽다) 웃긴 건 안 맞는다고 공포가 삭감되거나 할인이 되지는 않았다는 거다. 외려 매 맞는 가족들의 느낌을 가늠할 길이 없어 터질 듯한 두려움과 공포감 속에서 울며 찌그러져 살아가야 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어려움들 속에서도 이만하면 잘 큰 거지 싶다.


이때부터 나는 친구나 다른 인간관계 등에서 가족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갈구하고 바라왔다. 상대에게 과한 관심과 사랑을 주고 준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서운해하기 일쑤였다. 지금은 그런 행동들이 크게 나에게 위로가 된다거나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생존'을 하느라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친구가 나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점점 나는 나도 모르게 '어떤 감정'들이 쌓여가고 있었던 거다.


고아원에 보내지 않으려 노력해 주신 엄마와 (중간에 식당이 잘 되지 않았을 때 아빠는 우릴 버릴 생각이었단다) 그래도 엄마 나름대로 우리에게 사랑을 주려했던 점들은 분명 감사하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몰랐고, 자식들은 덕분에 결핍과 공포라는 감정에 알게 모르게 잠식되어 힘겹게 자라나야만 했다.


엄마에게 종교가 다인 이유

아빠에게 늘 맞고 살아야만 했던 엄마라 종교에 대한 끈을 더 놓지 못하셨던 거다. 기댈 곳이 없어진다는 건 상상만 해도 아찔하고, 종교에 태운 돈도 어마어마하기에 여러모로 두려웠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종교생활에 대해 뭐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각자의 입장을 존중해 주길 바란다. 그렇게 엄마를 생각하면 화가 나고 답답하고, 또 짠하고 가끔은 사랑도 하는 나를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치매 검사비는 하나도 아깝지가 않어~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미금역 기억상실 사건 이후 다음날인지 다다음날인지 하여튼 나는 바로 정신건강의원으로 달려가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았다. '치매검사'를 받기 위해서다. 검사비가 당시가격으로 해도 20~30만 원 정도 했었지만, 얼마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1시간 넘게 기계/ 종이검사/ 선생님과의 질의응답 등의 다양한 검사가 한 번에 이뤄졌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상담실에서 결과지를 본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뜻밖의 병명을 내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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