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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Sep 18. 2022

이 아줌마 머리 속엔 뭐가 있을까 #17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2022년 9월 17일

씩씩한 승연 씨의 이방인 일기 #17


2022년 9월 17일 


넷플릭스로 ‘예스터데이’란 영화를 보던 중 시계를 보니 밤 열 시가 넘었길래 아차차 일기 써야지 싶어서 잠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워드를 열었다.  

지금은 밤 10시 20분이고, 집에 혼자 있다. 

모든 불은 꺼져 있고 내 책상 위의 램프만 외롭게 켜져 있다. 

원래 밤이 되면 거실 통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리는데, 내리지 않았다. 

달빛이 들어오기를 기다리지만 심술 궂은 구름은 아직 갈 의사가 없어 보인다.

이렇게 혼자 있는 건 카밀과 미루가 시 낭송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벨기에의 앤트워프로 갔기 때문이다. 

내일 오후에나 온다. 

같이 갈 수도 있었지만 내일 약속이 있는 관계로 가지 못했다. 

밤 중에 집에 혼자 있는 경험은 꽤 오랜만이다. 

아니, 이 집에 이사온 후 이랬던 적이... 있었나? 

조용하다. 

보통 때 같으면 음악을 듣든지 팟캐스트를 듣든지 하는데 지금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다. 

그저 이 침묵이 좋다. 

영화를 다 본 후에도 계속 침묵 속에 있고 싶다.

냉장고 소리도 없고 환풍기 소리도 없고, 그저 내 귀의 낮은 이명만 울릴 뿐이다.

.

.

.

흠... 성급했군. 침묵이란 말 취소다. 

그러면 그렇지, 오늘이 토요일 밤인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길 건너 어느 집에서 파티가 열렸나 보다. 

붐! 붐! 붐! 붐! 진동하는 스피커 모습이 떠오른다. 

여느 뮤직비디오나 광고처럼 맥주병을 들고 춤추고 떠드는 젊은 남녀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전에도 썼다시피 여긴 인정사정없이 늦게까지 파티를 한다. 

오늘 밤 고생 꽤나 할 옆집에게 축복이 있으라. 

이렇게 집에 혼자 있을 기회도 드문데, 분위기 잡고 센치해볼까 했더니 제대로 산통을 깨네.

그래도 이 밤을 멋지게 표현하고 싶지만 가슴을 후비는 문장이 안 떠오른다. 

하기야, 언제 내가 문장으로 가슴을 후빈 적이 있던가. 

문장들은 내가 별로인 걸까? 

왜 안 오지? 언제든 웰컴인데.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겠다. 

이 일기는 땜빵이라고. 

의식의 흐름으로 스크롤을 채우려는 땜빵 일기. 

문학적으로 어떻게든 이 고독한 밤을 써보려고 했는데 마저 볼 영화가 기다리고 있어서인지 영 (경상도 말로) 파이다. 

카밀과 미루가 보고 싶다. 

카밀에게 괜찮은지 안부 문자 보내고 영화를 계속 봐야겠다.  

저 파티 때문에 헤드폰을 쓰고 봐야겠네.

영화 보고 바로 잘지, 그림 좀 더 그리다 잘지, 아니면 영화 한 편을 더 볼지는... 저 파티에 달려있다.

고독한 밤이 아니라 이런 얄궂은 선택을 고민하는 얄궂은 밤이다.

블라인드를 내려야겠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일기 #이방인일기 #고독 #파티 #땜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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