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수 "여행, The Original"
9월이 되자 아침 기온이 22도로 떨어졌다. 아직 낮은 덥지만 아침 출근길에 바람을 맞으면 가을이 된 것 같다. 그제서야 발라드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가을 밤, 가을 저녁을 함께하기 좋은 앨범을 한 장 얘기해보려고 한다. 오늘 소개할 앨범은 2024년 발매된 김범수의 라이브 앨범 "여행, The Original" 이다.
https://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k-g-oGANnwJpZjPHW20TNr38o8Z87Y0q8&si=JIaxeqCs9i9Pxjkt
우리가 기억하는 보컬리스트 김범수는 친근한 인상의 테너톤을 노래에 따라 자유자재로 굴리며 경이를 연출하는 테크니션이다. 교회에서 노래를 시작하여 서울예대 실용음악과를 졸업하고, 트레이너 박선주를 사사하며 대중음악계에 발을 들인 그는 이제 한국에서 실용음악 보컬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교본이자 롤모델이 되었다.
그는 연습으로 갈고닦은 기량을 유지하기 위해 술, 담배를 멀리하고 운동을 즐기며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그런데 이런 자세가 좋은 대중가수의 태도가 맞을까? 대중가수라는 직업에서는 무대에서의 기량만큼이나 캐릭터의 개성과 던지려는 화두가 중요한데, 그가 지향하는 철저함은 어떤 개성을 내세워야 하는 대중가수보다는 엄밀한 기량을 추구하는 클래식 음악가나 운동선수에 가까워 보인다. 앨범 단위 디스코그래피를 논하는 장에서 김범수가 제대로 언급되는 것을 보기 어려울 때면, 소위 말하는 '아티스트적 면모'가 그의 강점이 아님을 씁쓸하게 떠올리게 되기도 했다.
아무리 철저히 관리해도 기량이 절정에 이를 수 없는 시점이 된 2024년, 김범수는 스스로 목소리를 낮추고 그동안의 삶을 회고하는 앨범 "여행"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목소리로 전국 투어 콘서트를 열어 정규 1집부터 9집까지 모든 타이틀곡을 부른 뒤 이를 라이브 앨범 "여행, The Original"로 엮었다.
최근작과 어울리는 차분한 편곡으로 커리어 전체를 일관성 있게 묶어내는 과정에서, 각 곡에서 원 녹음본과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되는 점이 이 앨범의 주된 감상 포인트이다. 20대 초반 가수에게 부르게 했다고 믿기 어려운 마이너 발라드 '약속'이나 '하루'가 드디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 듯 하고, 지나치리만큼 하드한 가창이 돋보이던 '가슴에 지는 태양'이나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에서 힘을 덜어내자 곡의 애타는 감정선이 더 선명해졌다. 힘을 뺀 가창으로 발매 당시에는 비교적 주목을 받지 못했던 '위로'가 앨범의 편곡 방향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며 조명의 기회를 더 받게 되었고, 이 쟁쟁한 곡들 사이에서 최근작 '여행'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며 마음속에 잔잔한 파장을 남긴다.
커리어 전체를 되짚는 세트리스트 선정과 정규 앨범 "여행"에서 엿보이는 회고적 태도가 합쳐져 삶을 돌아본다는 큰 화두를 지탱한다. 비범한 슈퍼스타보다 친근한 노래쟁이이길 자처하는 자세가 디스코그래피 속 어떤 대중성과 맞물리고, 이를 불러내는 40대 김범수의 가창은 더욱 보편적인 설득력을 발휘한다. 차분한 톤을 유지하는 와중에도 '보고싶다' 만큼은 변함없이 절창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살아낸 25년의 커리어가 자랑스레 회고할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한때 오늘 죽지 말고 내일까지 살아 있을 이유였던 이를, 십 수년이 지나 조금은 살 만해진 시기가 되어 즐겁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은 일이다. 무대에서의 기량 유지에 삶을 바치는 듯 하던 그의 철저함은 그를 지금까지 이 자리에 남아있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김범수를 통해 어릴 적 내가 체득한 것은 일과 삶을 대하는 성실성이었다. 내게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면 삶을 이만큼 치열하게 대해야겠다는 일종의 기준점이 되어준, 그 귀감의 흔적과 궤적을 앨범 한 장으로 알아보고 싶다면 "여행, The Original"을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