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사기막힌 상호작용에 대해 -
기-막히다(氣막히다) 「형용사」
「1」 【…이】 어떠한 일이 놀랍거나 언짢아서 어이없다.
나는 그의 제안이 너무 기막혀 아무 말도 못 했다.
너무나 기막힌 일이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겠구나.
「2」 어떻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좋거나 정도가 높다.
음식 맛이 기막히다.
종대는 교도관들의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 그들의 초상화를 기막히게 그려 주었다.≪최인호, 지구인≫
* 출처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30대 중반, 직장생활 11년 차(인턴까지 포함하면 13년 차)를 맞이하며 마음에 되새기는 '불변의 진리(?)'가 있다. 바로, "인생사 상호작용"이라는 것.
회사라는 집단 안에서 서로 바글거리며 지내니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와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게 확연히 보인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나는 내가 겪을 수 있는 상호작용의 끝판왕을 지금 이런 방식으로 겪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 달 반 전, 나는 팀 이동을 했다. 이전에 써둔 글을 빌리자면, 내 팀 이동에는 다음의 사정이 있었다.
**최근 팀을 이동하며 새로 맡은 업무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해오던 업(業)의 확장이자, 변화된 비즈니스 환경에 새로 갖춰야 할 역량이라 판단해 예전부터 독학으로 공부도 했었다. 그러다 올 1월 상무님의 제안이 있어 흔쾌히 수락했으나, 맡은 업무들이 4월에 끝나 이제야 이동하게 된 것이다.**
내가 팀을 이동할 당시, 해당 팀에는
- 업무 연관성이 '0'인 부서에서 그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 나보다 두 달 먼저 부서이동을 했던 한 분의 팀원(A)이 있었고,
- 해당 분야에 대해 전문성이 있는 팀원(B)은 육아휴직 중으로 약 2달 반 후 복귀 예정이었으며,
- 팀장은 공석으로 외부 채용이 진행되고 있었다.
담당 팀을 꾸리던 상무님은 나를 그 팀에 추천한 후 퇴사하시는 바람에, 전문성을 요하는 팀의 업무를 누구도 주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해당 팀에 채용될 '팀장'의 역량이 그만큼 중요했고 책임이 막중했으며 A와 나는 우리를 이끌어줄 전문가 팀장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팀 이동 후 한 달간 나름 고군분투하며 업무 파악에 열의를 다했고, 드디어 외부 채용으로 경력직 팀장이 왔다. 해당 분야 전문가로 뽑힌 '그녀'는 14년 차로 OOO에서 신입부터 지금까지 근무했다고 했다. 인사 정보를 볼 수 없던 나는 그저 '알아서 잘 뽑았겠지'라는 믿음으로 환대했고, '그녀'의 입사 날, 나는_작년 말 옆 팀에서 일하며 친분을 쌓았던_육아휴직 중인 B에게 업무와 연계된 외부 강의 관련 정보를 전달할 겸, '팀장님 뽑혔어요, 오늘부터 출근이에요!'라는 환희의 톡을 보냈다. 어디에서 왔고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은 B는 갑자기 대화를 마무리했고, 그다음 주 회사에 찾아온 B와의 대화에서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B는 새로 온 팀장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OOO에 입사해 신입부터 몇 년간 근무하였고, 아직 동기들은 그곳에 근무하고 있었다. OOO의 정보에 빠삭한 B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낸 이력서는 '사기'나 다름없었다.
- 우선, 해당 분야를 입사 초 4년 여 밖에 겪어보지 않았다. 즉, 첫 번째 필수항목인 '관련 경험 10년 이상' 자격요건을 불충족한다.
※ 참고로, '그녀'는 이 팀의 팀장으로 12-13억 예산이 집행될 '해당 분야'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시스템 구축으로, 일회성이 아니라 전사 업무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 'ㅁㅁㅁ 업무' 경험이 없다. 이는, 두 번째 필수항목인 'ㅁㅁㅁ 경험 필수' 자격요건을 불충족한다.
- 해당 분야 4년 여 근무 후 퇴사까지 다른 부서에서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했다.
- 14년 차이나, 중간 3.5년 + 최근 육아휴직 6개월 = 총 4년의 휴직기간이 있다. 법적으로 육아휴직이 연차에 포함되긴 하나, 모든 팀원들이 10년 이상 경력인 팀의 팀장 자격을 갖기에 적합하지 않다.
거짓 이력서 외에도 '그녀'는 OOO에서 다른 사람들과 일하는 데에 문제가 많아 평판이 안 좋았으며, 인사고과가 좋지 않아 몇 년째 차장 진급 누락으로 지방 발령이 확정되었는데, 이를 피하고자 육아휴직 중인 상태였다. (이곳 지원 시, 본인이 휴직 중이라는 것도 숨겼다가 최종 인사팀장 면접에서야 알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한 층에서 B와 2년을 함께 근무했기에 전혀 모를 수가 없는데, 입사 날 상무님과 티미팅을 하는 자리에서 B를 알지 않느냐고 묻자 '모르는 사람'이라며 잡아뗐다. B라는 이름은 알고 있으나 자기가 아는 B는 ㅍㅍㅍ라는 곳에 갔다는 거짓말과 함께...
그날 B는 나에게 '퇴사를 고민하다 휴직을 연장하기로 결심했다' 얘기했고, 나는 해당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B가 '그녀'로 인해 복귀 시점을 코앞에 두고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음에 걷잡을 수 없이 착잡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사기 행각을 알게 된 후, 나는 이걸 상무님과 인사팀에 얘기해야 하는건지, 어렵게 도전했던 이 업무에 어떤 마음으로 임해야 할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거짓 이력은
B가 '새로 팀장 뽑을 경우 꼭 나에게 알려달라'라고 신신당부했던 걸 A가 어기지만 않았어도,
면접을 봤던 사람들이 해당 분야 전문성에 대한 질문만 제대로 던졌어도,
인사팀의 레퍼런스 체크가 제대로만 이루어졌어도,
알 수 있는 명백한 것들이었다.
또한, 타 팀의 팀장인 J 차장과 면접을 봤던 P부장은 그녀 이력이 거짓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음에도, 이미 입사하였으니 어쩔 수 없다며 묵인했고, A 역시 내가 이 얘기를 해주었을 때 당황한 듯했으나, 본인보다는 이 업무를 더 알고 있는 듯 하니 괜찮다며 '그녀'의 지시를 잘 따르고 있다.
나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을 다잡았다가도 한숨이 나오고, '그녀'가 내뱉는 어이없는 한마디를 들을 때면 마스크 뒤로 썩어가는 표정을 지으며 착잡함에 휩싸였다. 이런 롤러코스터 같은 기분변화를 겪던 어느날 옆을 보니, 뻥 뚫린 창밖으로 고요한 산과 빌딩, 나무, 차로 가득 찬 평화로운 거리가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새삼 여기에 버티고 있겠다는 생각이 나를 미쳐버리게 만드는 건 아닌가 싶었다. 여기에 있지 않아도 된다면, '그녀'가 사기를 치든 말든, 12-13억 시스템을 말아먹든 말든,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내가 상관 할바가 아니라는 생각과 내가 빠지면 이런 불협화음도 없을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렇듯 모두의 안일한 태도로 이뤄진 거짓된 평화는 '최선을 다해 일하고 싶은' 나에겐 최악의 구렁텅이, 수렁이나 다름없다. 이 업무를 배우겠다는 하나의 목적만을 생각한다면 꾸역꾸역 버틸 수 있겠으나, 그 버팀도 이제 어떤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걸 확신했다.
나는 본격적으로 이 수렁에서 나오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