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에는 사랑한 만큼의 슬픔과 상실감이 뒤따르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애도의 시간 동안 화가 났다가, 슬퍼했다가, 절망했다가, 보고 싶다가, 후회했다가, 다시 화가 나고 슬퍼하는, 감정의 굴레 속에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을 직면하죠. 모두 그럴 거예요. 제가 해왔던 이별의 끝에도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했던 것 같아요.
초반에는 여느 이별에서 느낄 수 있는 상실의 아픔였어요. 다만, 헤어짐의 시점이 마음의 끝나가던 이전과는 달리 마음이 커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만큼 슬픔의 크기가 컸겠죠. 그래도 처음 며칠, 그때까지만 해도 사리분별이 제대로 되고 있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짧았던 기간에 비해 그 사람과의 이별은 그 고통이 유난히도 크고 깊어서 감당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도저히 혼자 해결하지 못할 때 늘 상담을 신청하는 저의 멘토님에게 이번에도 혼자 정리가 안 되어 찾아뵙고 심리 상담을 받았는데 제가 겪는 아픔의 크기에 놀라실 정도였으니까요.
왜 그럴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조건없이 존재 자체를 사랑했었기 때문일까. 이제 막 시작한 마음을 갑작스럽게 끝내야 해서 생기는 미련일까. 과도한 분석쟁이답게 나에게 주어진 정보 속에서 계속해서 생각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두 달 넘게 헤매고 헤매다 발견한 고통의 원인은 '죄책감'였죠.
한 순간에 들이닥친 그와의 이별에 저는 저를 탓했어요. 그가 제게 얘기한 이별의 이유는 저였으니까요.
그 사람이 '상처'라고 표현했던 그날이, 그리고 전에 자신에게 상처를 준 다른 사람과 제가 '겹쳐' 보여서 안 되겠다고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마음이 아파왔어요. 제 이해력으로는 제가 했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고 되뇌어봐도, 무엇이 상처고 왜 내가 다른 사람과 겹쳐 보인다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 그 과정에서 저는 제 모든 게 싫어질 수밖에 없었죠. 이래서 그랬나, 저래서 싫었나,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었나.. 그와 나눈 대화들을 지칠 정도로 곱씹어보며 제 스스로가 얼마나 미워졌는지 몰라요.
그러다 제가 얘기했던 사내 심리상담에 이르렀는데, 심리상담에 문을 두드리게 된 계기는 매월 정기적으로 받는 상담소의 뉴스레터에 실린 글이었어요. 그중 "섬세한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을 상상하며 '자신을 탓하는' 심리적 버릇이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아, 난가?' 하며 이 상황에 이입하게 되었고, 나 자신을 오롯이 수용하고 인정했던 내가 이렇게까지 내 탓을 하는 지경에 이른 게 혹시 일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그 내용을 상담사분께 털어놨죠.
사업기획 시기와는 다르게 4월부터 막상 기획/디자인/개발이라는 실무가 진행되면서부터 제가 가진 전문지식이 아닌 에이전시들의 아웃풋을 검토하고 의견 주며 컨펌하는 업무를 하다 보니, 잘 모르는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컸어요. 게다가 10년간 전문분야에서 능수능란하게 제 업무를 컨트롤하던 때와 달리 "미안하다"는 말을 정말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미안해야 하는 상황'도 분명 있지만, 그보다는 미리미리 파악하여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상대방 업무에서 실수가 발생되더라도 결국은 매니징을 못한 '제 잘못'으로 얘기해야 하는 경우도 많고, 협력사 직원들과의 업무가 많다 보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 탓이오'로 넘어가고요.
이 부분이 제 일상에도 영향을 미쳐, '미안함'을 표하는 게 많아진 것 같아요. 제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상대의 문제까지 '내가 잘못해서'라고 생각을 끌고 가는 게 잦아졌어요.
"원래 제가 저한테 화살을 돌리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리더 역할이나 직무 변화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과정일까요? 건강하게 상대를 대하기 위해 어떤 마음으로 지내야 할까요?"
그렇게 시작한 상담사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가장 처음으로 들은 얘기는,
"상대방의 말은 상대방의 것이에요. 생각도 그 사람의 것이죠. 그 말과 생각을 다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요."
였어요. 그런데 멘토님과 상담할 때도 제게 따라 하라며 말씀하신 문구도
"제가 책임질 것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책임져야 할 것은 당신이 책임지세요."
였어요! 이렇게 두 분께 비슷한 말을 들으니, '아 내가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 휘둘리고 있었구나.'라고 단박에 깨치게 되었죠.
그리고 이어진 성격 강점 검사.
상담사님이 성격검사 결과를 분석해주시며 이 도표를 보여주시고는 "어떠세요? 어떤 생각이 드세요?"라고 물으셨고 저는 이렇게 답했어요.
"제 자신에게 좋은 것보다 남에게 좋은 성격이네요.. 저한테 더 따뜻해져야겠어요."
타인 지향의 강점이 4개, 자기 지향 강점이 1개. 이러니 '제 옆에 있는 사람은 따뜻하겠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제 자신에게 미안해졌죠. '나는 얼마나 나를 사랑했던가.'
스스로를 애틋해하고 사랑한다 생각했지만, 타인의 한 마디에 자신의 모든 걸 부정하려 했던 제 자신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그리고 일과 일상 모든 대인관계에서 미안함의 표현을 원만한 관계를 위해 너무 남발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저는 객관적으로 저를 바라보는, 한 마디로 주제 파악을 잘하는 사람이라 잘못한 게 있으면 빠르게 인정하고 바로바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편이에요.(미안함에 있어서는 방어기제가 없다는 게 지금 보니 제 가장 큰 장점 같기도 하네요)
그런데 올해 들어, 미안함을 표현하지 못하고 '남 탓'이라는 방어기제를 작동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헤어진 그 사람도 그랬지만 업무를 같이 한 협력사 중 한 분도 어찌나 남 탓을 하는지 그 화살이 제가 아닐 때에도 정말 피곤할 정도였거든요.
방어기제를 몰랐을 때는 그 사람 안에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들여다볼 생각보다는 '왜 저럴까'하며 그 사람을 안 좋게 보았는데 지금은 '미안함을 저렇게 표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요.
당신은 '미안함'을 어떻게 표현하시나요?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동료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면 당신은 '미안할 일을 전혀 하지 않았거나', '미안함을 표현해야 할 때 하지 않았던' 걸 거예요. 미안함을 표현해야 할 때 하지 않았다면, 혹시 방어기제로 농담, 조롱, 엉뚱한 소리, 회피, 남 탓, 자기 합리화, 핑계, 냉담한 척, 분노 등으로 상대의 마음을 무시하거나 화살을 돌리진 않았나요?
미안함에 대한 감정은 우리가 타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해요. 미안했어. 한마디가 가져오는 따뜻함이 얼마나 큰지는 그 말을 하는 사람도 그 말을 받는 사람도 모두 느껴지고, 우리의 관계가 끝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지금보다 더 강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오늘도 저는 제 자신에게 "미안했어"라고 얘기해봅니다. 앞으로 너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겠노라는 다짐과 함께요.
÷ 자신이 잘못을 했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줬을 때, 죄책감 덕분에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타인이 부정적 감정을 가지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죄책감과 죄악감을 느낀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으려면 '감정의 경계선'을 명확히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느 것이 내 감정이고 어느 것이 네 감정인지 분명해야 한다. 나와 타인 사이에 감정의 경계선을 그었다면, 그다음에는 '나는 내 감정을 가지며 그 감정에 책임을 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감정에 대해서도 '너는 네 감정을 가지며 네가 그 감정에 책임을 진다'는 것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 류페이쉬안 「감정은 잘못이 없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