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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비 Oct 10. 2022

10.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음악 제작기

강한 확신




겨우 내 아빠의 카세트테이프 정리를 마치자 2019년의 새로운 해가 밝았다. 그리고 나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본래 나의 직업은 '연극배우'이다. 학창 시절부터 하고 싶었던 수많은 일 가운데 연기를 선택하였고, 부모님은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셨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엔 차근차근 현장에서 무대 경력을 쌓았고, 바라던 결과가 있을 때면 그만큼의 성취감을 느꼈다. 하나의 작품이 끝나면, 쉴 틈도 없이 다음 작품을 준비하곤 했다.

그러다 문득, 처음 느끼는 종류의 슬럼프가 찾아왔다. 사실 아빠의 부재는 나의 모든 일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때는 2018년, 대학로에서 연극 <골든타임>을 공연하던 때였다.

나는 열 명의 극 중 인물 가운데 아빠를 화재사고로 떠나보내는 고등학생 역할에 캐스팅되었다. 이 캐릭터를 연기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의도치 않게 커다란 감정 소모를 겪게 되었다. 오르내리는 감정 기복과 함께 불면증이 생겼고, 공연을 하던 도중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회피와 강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나의 컨디션과는 달리 공연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지만, 잠시 반복되는 이 생활 패턴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가 싫어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라는 존재가 소모된 것만 같았다. 번아웃이었다.

하지만 쉼에 앞서 경력의 단절과 그에 따른 막연한 두려움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만 하지.'


그러나 내심 알고 있었다.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결심했다. 마음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조금은 무모해 보일지라도 지금까지 해오던 일들은 잠시 뒤로 한 채, 아빠의 유언을 실행하는 데에 열중해보기로.

더 늦기 전에 아빠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동시에 이십 대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하지 않고는 모를 또 다른 행복을 발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막했다. 처음 시작하는 일이었고, 주변 그 누구도 경험한 바 없는 일이기에 자문을 구할 상대도 없었다.

아무리 아빠의 음악을 곁에서 듣고 보며 자랐다 하여도 이 곡들은 정작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주변에 뮤지컬과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꽤 있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로의 작업 방식과 음악 취향 등이 맞아야 하고,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할 장기 파트너를 구해야만 하는 중요한 부분이기에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이토록 많은 생각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어도 결국 결론은 단 하나였다. 걱정 따위는 뒤로 한 채, 부딪혀보는 것, 그것만이 가장 나다운 선택이었다.

모르면 배우면 되는 거고, 시행착오가 있을 시엔 시간과 공을 들여 다시 하면 된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존재하므로 겁이 나거나 주저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한 발자국 물러설지, 두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지는 선택에 달려있다.

또한 결과 지향적 사고방식에만 존재하는 것이 성공과 실패의 개념이다. 예술이란 절대평가의 영역이 아니기에 이 프로젝트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모양과 방향은 각기 다른 것이 당연하고, 다름에 매력이 존재한다.

게다가 이 일은 아빠의 딸인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사실을 깨닫자 자부심이 차올랐다. 이 세상 수많은 일 가운데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한다는 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마음이 설레고 두근거렸다.


나는 이 모든 걸 되새기며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프로젝트를 완수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은 나를 믿어주자. 조금은 서툴더라도 나를 응원하며 나아가 보자.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모색해 보았다.

하나. 아빠의 카세트테이프 가운데 발매할 수 있는 음악 추리기
둘. 아빠가 남긴 가사와 집안 곳곳에 남은 습작의 글 모으기
셋. 이를 바탕으로 나를 도와줄 프로듀서 찾기


남들과 조금은 다른 모양일지라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음악 제작기’가 시작되었다!









하나. 발매할 수 있는 음악 추리기

두 달 내내 들어본 카세트테이프 내에는 완성된 곡 외에도 다양한 습작이 존재했다. 바람으로는 이 모든 곡을 발매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또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음악, 아빠가 생전에 내게 들려주시지 않은 곡을 마주할 때면, 남아있는 기록과 기억에 매달려야만 하는 현실에 부딪혔다. 


그래서 우선 가능한 곡이 무언지 정리해 보았다. 열일곱 곡의 음악을 추렸다. 그러자 나아갈 방향이 보였다. 어떤 곡은 멜로디를 덧붙여 완성해 줄 작곡가 겸 편곡가가 필요할 것 같았고, 어떤 곡은 남성적인 색깔이 강해 여성인 내가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남성 보컬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둘. 아빠의 가사와 글 모으기

아빠는 글 솜씨가 뛰어났고, 그 덕에 집안 곳곳에는 습작이 많이 존재했다. 그런 아빠의 작품이 나중에 가사로 쓰일 수 있길 바라며 정리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참 많이 울고 웃었다. 한 사람이 남긴 ‘글’에서 우리는 그의 생애를 엿볼 수 있다. 오고 간 발자취를 남기는 데 글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는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결심했다. 나도 이 생애에서 다양한 흔적을 글로 남길 것이다. 먼 훗날, 내가 곁에 없을 때 나를 사랑했던 이들이 나의 글을 읽음으로써 다시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아빠가 나에게 그래 준 것처럼 가능한 많은 사랑을 남길 수 있다면, 참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셋. 나를 도와줄 프로듀서 찾기

가장 관건이고 어려운 단계였다. 이 유언의 실행은 사실상 나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를 도와줄 귀인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함께 작업하고 싶은 귀인은 이러했다.

1) 음악적 전문성을 지닌 리더

2)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

3) 나의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내가 좋아하는 결의 음악을 하는 사람


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음악가들을 존경한다. 대한민국 내 좋아하는 뮤지션은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장르에 상관없이 좋은 음악을 하는 뮤지션을 찾아 듣는 건 내 인생의 커다란 기쁨이다. 그런 뮤지션과 함께 아빠의 음악을 작업하게 된다면 더할나위없이 감사한 일이라 생각했다.








2018년의 겨울, 연극 공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내내 칼바람이 불었다. 내가 공연하던 극장에서 걸어 나오면 한 대학병원이 보이는데, 그곳은 아빠의 장례를 치른 곳이기도 했다. 그곳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날따라 가슴 한쪽이 따끔했다.

뒤엉킨 머릿속을 가볍게 하고자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문득, 어떤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말하듯이 읊조리는 목소리가 하루의 모든 슬픔을 쓸어버리듯 했다.

때로 한 곡의 음악은 열 마디 말보다도 더 큰 위로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뮤지션의 음악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 뮤지션의 이름은 '빌리어코스티'였다.


잠들기 전, 한참을 생각했다.

이 분이 누구인지, 몇 살인지, 또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이런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내가 찾던 '그 사람'일 수 있지 않을까. 바보 같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부탁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다시금 생각이 올라왔다. 

만날 수 있는 방법도, 또 나와 함께 할 가능성도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머지않아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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