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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비 Oct 08. 2022

09. 다시 만난 나의 산타클로스

바통터치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산타클로스 존재의 유무를 열세 살까지 믿었다.

주변 친구들이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그 믿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아빠의 놀라운 연기력과 그에 상응하는 따뜻한 크리스마스 선물 덕분이었다.


어린 날, 아빠는 내게 말씀하셨다. 



“이 크리스마스 선물은 한 해를 잘 마무리하며, 올해도 예나가 세상에 빛을 밝히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산타 할아버지가 주시는 ‘작은 보답'이란다.

앞으로도 예나가 가진 기쁨과 행복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며 그 에너지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눈다면, 예나는 살면서 언제 어디서든 보답을 받는 사람이 될 거야!”


살면서 언제나 보답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건 기쁜 일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오래전 아빠의 말씀처럼 타인을 존중하고, 한마디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세상에 좋은 영향과 에너지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이 모든 것이 삶의 보답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 겨울.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던 어린 나날로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 따뜻함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12월이 오면 아련한 그리움이 일렁인다. 

선물 너머 나를 바라보던 아빠의 첫눈 같던 미소가 마치 어제처럼 선명하다.








[바통터치]


어느덧 2018년 겨울이 되었다. 그리고 아빠가 긴 여행을 떠난 지도 일 년하고도 반년이 훌쩍 흘렀다.

그간 상실에 대한 부정의 단계가 길었던 탓일까. 나는 단 한 번도 아빠가 남긴 유품들을 꺼내보지 않았었다. 


회피하고 싶었다. 집에서 무심코 발견한 사진 한 장에도 가슴이 내려앉곤 했기에 곳곳에 적힌 흔적들을 외면하기 일쑤였다.

또 아빠가 남긴 유언, 당신의 카세트테이프를 떠올릴 때면, 가슴 한 편에 자리한 묵직한 슬픔이 나를 짓눌렀고, 어디론가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게 용기가 생겼다. 이제는 괜찮을 거라는 믿음,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상실의 터널을 지나 성장한 나를 발견하였다. 





서랍장을 열자 아빠가 남겨둔 다량의 카세트테이프들이 보였다. 자연스레 아빠의 유언이 떠올랐다.


아직 내 삶에서 아빠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남아있다.' 이 한 문장은 어둠 속에 있던 나를 단번에 꺼내어 꿈을 꾸게 했다. 마치 시간을 되돌려 아빠와 함께 한 그 나날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티켓'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빠와 재회할 수 있는 기회,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그러나 이 유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걱정되는 부분도 많았다. 아빠가 남긴 곡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고, 내겐 음악을 만들고 발매하는 것에 대한 전문적인 프로세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는 나의 모든 성장과정에서 가르쳐주었다. 주저앉더라도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한 발 물러서더라도 두 발 나아가는 법을.


카세트테이프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 무려 여든 개!

‘와, 이걸 언제 다 듣지?' 무척이나 막막했지만, 그조차 기쁨에 차올랐다. 마치 예쁘게 포장된 크리스마스 선물상자를 뜯는 것처럼 마음이 설레고 두근거렸다.


그렇게 나는 2018년 11월부터 12월까지 한 달 반의 기간 동안 80개가량의 카세트테이프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들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밤마다 귀가해서 또는 아침을 시작하며 습관처럼 아빠의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해두었다.

카세트테이프마다 번호를 하나하나 새기며 정성스레 체크하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린 날의 그 겨울을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삶의 순간들이 존재하였다. 오고 가는 일상적 대화 속에 빵빵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 존재했고, 귀를 타고 스치는 아련한 기억에 눈물이 터져 나오는 순간도 있었다.

나의 앳된 목소리가 등장하기도 했고, 지금의 나보다 어린 아빠와 엄마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또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아빠와 오빠의 대화가 담겨있기도 했는데, 아빠의 목소리가 지금 오빠의 목소리와 많이 닮아있어 꺄르르 웃기도 했다. 아빠가 엄마에게 사랑을 말하는 순간도, 아주 오래전 당신의 청춘을 노래하던 순간도 발견했다.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모든 순간은 사랑을 노래했다.

작별 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만 같았지만, 아빠는 내게 꿈처럼 다가와 일러주었다. 이 유언의 실행은 ‘우리의 끝이 영원한 이별이 아닌, 영원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기회'인 거라고.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점차 늘어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덕분에 2018년의 겨울은 나에게 매일매일이 크리스마스였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떠난 후에도 계속 그 대상을 붙잡아둘 수 있다. - 알랭 드 보통 『영혼의 미술관』










ⓒ 2021. (김아란) all rights reserved.


나의 하나뿐인 산타클로스에게. 

잘 지내고 계시나요?
어느덧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나는 아빠와 함께 한 어린 날의 겨울을 떠올릴 때면, 여전히 따뜻한 꿈속에 젖어들어요. 
참 염치없이 늘 받기만 한 나예요. 바라는 것 없이 늘 주기만 하는 당신에게 보답을 받는 쪽도 언제나 나였죠. 
그러니 너무 늦은 게 아니라면, 이제는 나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30년이 흐른 지금에야 ‘바통터치’ 합니다.
당신이 꿈꾸던 크리스마스는 무엇인가요?

이제는 내가 아빠의 산타클로스가 되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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