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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Oct 26. 2019

10월의 생존 신고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일 수 없는 이유 

투약을 중지한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고 싶어 다시 브런치를 켰다. 5월 29일 시점에서 우울증 약을 끊은 지 한 달이 좀 넘었다고 썼으니 10월 말인 지금 기준으로는 6개월이 좀 넘은 정도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한 것은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순간이 있었다 해도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미약했다는 의미이리라. 며칠 전 장을 보다가 내 뇌가 유독 쌩쌩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전과는 조금 달랐다. 뇌의 기억 저장소에서 원하는 정보를 바로 찾아낼 수 있었고, 정보들을 조합해서 원하는 결과를 내는 데에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텅 빈 소리가 이제 들리지 않았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이 기억이든 지식이든 감정이든, 전에 비해 확연히 채워져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 무게가 과거에도 미래에도 완전히 휩쓸리는 일 없이 이 순간에 꼭 달라붙어 걸을 수 있도록 중력을 만들어 줬다. 


 자신을 매도하는 버릇이 많이 고쳐졌다. 오히려 요즘은 약간 과보호하는 편에 가깝다. 잘한 일은 솔직하게 자랑스러워하고, 못한 일이나 부족했던 일이 있으면 하루 이상 기죽지 않으려 한다. 이미 벌어진 일은 엎어진 물이나 같다. 엎어진 물은 서둘러 닦아내야지, 주워 담으려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서 올해 초에 비해 뇌가 똑바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무척 자랑스러웠다. 이봐, 우리가 한 거야. 살아서 2019년을 못 맞을 줄 알았잖아. 그런데 벌써 3/4이나 왔다고. 매일 부작용 때문에 변기통을 붙잡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어. 꽤 대단한 일 아니야?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모든 일에 단단한 마음으로 임하지 않아도, 매일이 무너질 것 같았어도. 그래도 괜찮다. 버텨냈으니 되었다. 버텨낸 것들에게는 자연스럽게 깃들기 마련이다. 유연한 강함이. 

 흔히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라고들 한다. 우울증이 한창일 때부터 이만한 개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 감기약은 우울증 약처럼 자살 충동을 가장 흔한 부작용으로 안고 가지 않고, 감기약은 우울증 약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의 부작용을 보유하지 않았다. 변비를 거쳐 구강 건조증 찍고 구토감, 어지럼증, 게다가 자살 충동의 증가까지. 우울증의 정말 마음의 감기라면 왜 치료하는 과정마저도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나. 괜히 이딴 이름이나 붙이니까 감기처럼 무식하게 참으면 낫는다는 인식이나 따라붙지. 아무튼 뭐든 갖다 붙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망친다고 혀를 쯧쯧 찼다. '우울증 약이 자살 충동을 부작용으로 갖고 가는 약이면 먹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이 생각 때문에 비교 검토를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준 3일 치의 프로작을 버린 적이 있다. 하지만 환자들이 이런 부작용을 몰라서, 혹은 이것이 괴롭지 않아서 꾹 참고 약을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약을 먹는 건 그런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당장 살아야 하니까, 당장 돌아가야 할 일상생활이 있어서다. 먼저 항우울계 약들이 자살 충동을 가장 흔한 부작용 중 하나로 가져가는 건 사실이지만 이 부작용은 사람마다 상이한 증상과 수준으로 나타난다. 가장 흔한 부작용이라고 해서 무조건 위험한 수준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또, 위에서 말한 부작용들이 골 때리는 증상들이긴 하지만 변비에 구강 건조증, 멍함과 어지럼증, 구토감을 달고서라도 일상은 이어 가야 한다. 어쨌든 그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몸속의 세로토닌을 일정 수준으로 관리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이므로. 


 간단한 수준의 우울증도 치료하는 데에는 최소한 세 달이 걸린다. 또 병리학적인 우울증은 예를 들면 이혼, 사별, 불합격 등 어떤 이유가 있어서 끔찍한 기분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물론 이 경우에도 약을 처방받을 수 있고, 이 경우 느낄 심리적 고통이 결코 절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장 주변 사람들에게 감기에 걸렸다고 하면 약국이나 병원에서 약을 타 먹고 푹 쉬라는 응답이 돌아오지만, 우울증을 호소했을 때 같은 수준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사람들은 당신이 언급한 우울을 앞서 언급한 '이유 있는 단기간의 우울'로 취급하거나 '계절성 증상'으로 다룰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 보는 건 나나 김태희나 눈이 두 개고 코가 하나고 입이 하나이기 때문에 똑같이 생긴 사람이라고 보는 것만큼이나 억지스럽다. 

 이전 <해를 기다리는 아이> 연재에서 내가 다니던 정신과 선생님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우울증의 회복 과정은 비례를 나타내는 그래프처럼 정직하게 위를 향해 올라가지는 않지만, 오실로스코프의 곡선처럼 꿀렁대더라도 결국은 위를 향해 간다고. 터널처럼 구불구불하지만 결국은 다시 밖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감기의 회복 과정은 어떤가? 대부분은 시간을 들여 휴식하면 1-2주 내외로 회복한다. 감기가 악화되는 데에는 알기 쉬운 이유가 있고, 우울증은 약간의 회복으로 희망을 맛 보인 후 발목을 휘어잡아 다시 수면 아래로 끌고 가는 질병이다. 또 투약 중지와 부작용, 음주 외 외부요인 등의 변인을 제외하면 이 과정에 이해하기 쉬운 이유는 없다. 이름 있는 것들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의 감기' 따위의 흐리멍덩한 이름으로 포장한들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항우울제를 투약하면서 가장 먼저, 우울증의 장막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났다. 그 구멍들 사이로는 가뭄에 콩 나듯, 작은 행복감들이 밀고 들어왔다. 길가의 어린이들을 보고 귀엽다고 미소 짓는 시간, 점원들에게 진심을 섞어 미소 짓는 시간이 점점 늘어갈 즈음 분노가 돌아왔고, 짜증이 돌아왔다. 5월 말에 글을 썼을 땐 뇌의 한 구석에 여전히 자물쇠가 걸린 것처럼 슬쩍 마비된 기분이 들었지만 일상생활에는 무리가 없었기 때문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전과는 달리 울고 싶을 때도 눈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건 치료 초기의 '죽고 싶진 않은데 몸이 자꾸 죽으라고 속삭인다'는 고민에 비하면 약간 사치스러운 고민이었으니까. 삶에 선명함이 돌아왔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더 욕심 낼 구석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거의 우울증 이전과 같은 수준으로, 복잡한 일을 처리하고 다양한 일을 우선순위와 마감에 따라 분류하여 처리한다. 울고 싶을 때는 그럭저럭 잘 운다. 


 2019년도 다 지나가는 지금, 나는 살아있다. 나만의 사람으로, 이 행복에 의심이라곤 품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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