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번째

뿌리가 생각보다 깊은 곳에 있었다

by 체리

이번 주는 병원에 가는 주말이었다. 우울증이 많이 좋아진 후로는 병원에 가는 걸 딱히 압박으로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번 주는 그랬다. 그다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에는 말해야만 한다는 걸 아는 사실을 줄곧 마음에 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내 담당 선생님이 이번 주말에는 쉰다는 걸 알고 나서는 안심했다. 이번 주는 말 안 해도 되니까. 정신과에 가기 전에 다른 병원-정형외과-에도 들러야 했기 때문에 정신과에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 도착했다. 1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옆의 편의점에서 빼빼로와 물을 사서 정신과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조금씩 먹었다. 중년의 여자가 급하게 뛰어들어온 건 그때였다. 그녀는 당장 모 선생을 봐야 한다고 말했고, 간호사 선생님은 지금이 점심시간이고 모 선생님이 이미 퇴근했기 때문에 어렵다고 했지만 중년 여자는 강하게 주장했다. 당장 모 선생을 봐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 있다고. 지금까지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다니는 병원의 간호사 선생님은 프로였다. 싫은 기색이나 난처한 기색 하나 없이 환자를 응대했다. 이번 주말은 유난히 더웠고 점심시간은 누구에게나 마땅히 주어져야 할 휴식이니까. 대단한 일이었다. 그 환자는 결국 원하는 것을-마침 그 선생님은 퇴근 준비 중이었다- 얻어냈고, 나는 빼빼로를 씹으며 관심이 없는 척을 했지만 사실. 자신에게 필요한 순간 원하는 것을 그렇게 강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자신에게 잘해주려 애쓰고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관찰할 수 있는 수면 위밖에는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다지 믿음직한 결론은 아니지만. 조금의 수치도 느껴졌다.

우중충

내가 과거에 했던 일들이 사실 나 스스로를, 어느 순간에든 죽이고 싶어서. 동시에 그 죽임이 '나의 선택' 이 아닌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연출하고 싶어서 한 일들임을 깨달은지는 꽤 오래되었다. 또 이것을 깨끗하게 인정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우울증의 한 증상은 '하기 싫은 일인데 하게 만드는 것' 인지도 모르겠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로 안 할 일을 하게 만드는 것? 주로 자기 파괴적인 면에서. 내 말을 들은 친구들은 내가 모험심이 있고 사교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라고 착각하기 일쑤였지만 난 그저 남의 손을 빌어 죽고 싶고, 편리하게 자신을 파괴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우연히, 매 순간 만난 사람들이 대단히 좋은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 친절에 빚을 져가며 연명했을 뿐임을 깨달았다. 말했듯이 이것을 깨달은지는 좀 되었는데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면 늘 아래와 같은 생각의 연쇄에 빠졌다.

'그래, 난 그냥 운이 좋아서 살아있는 것뿐이야' -> '다 지나간 일이지, 그래도 의사 양반한테는 말해야 될 것 같아' -> '니 말이 맞아, 다 지난 일이야. 근데 의사 양반한테 말해봤자 변하는 게 있니? 이젠 그런 짓 안 하잖아.'

이 생각들이 꼬리를 문 뱀처럼 뱅글뱅글 돌았다. 하지만 나는 자신에게 필요한 걸 날카롭게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고, 이 생각이 자꾸만 반복된다는 건 아마도 의사 양반한테 말하는 편이 좋다는 뜻이겠거니 생각한다. 그 정도는 자신을 믿는다.

자꾸만 자신을 내쳤다. 나는 정말 세상에 나 빼면 내 편이 없는 것 같은 순간 외에는 내 편이 되어준 적이 없다. 내가 나 자신과 분리된, 다른 인격체였더라면 나는 나를 가까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다 보면 사소한 것이나마 이 선택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긴가민가한 순간들이 온다. 내게 일어난 일을 예로 들어보면 얼마 전 게임기를 팔러 나갔는데 구매자가 나에게 게임기 상태를 보고 싶으니 자신의 차에 타라고 말했을 때 정도일까. 다행히 나는 지난 1년여의 시간 동안 돈과 시간을 치료에 쏟아부으면서 배운 것이 있었기에 그건 싫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난 1년, 그리고 애인을 만나 정서적으로 교감하기 시작한 그전의 1년을 제외한 3-4년 남짓 되는 기간 동안 나는 늘 '까짓 거 못 탈 건 뭐야'라는 식으로 자신을 위험에 내던졌다. 당시엔 '나는 모험이 좋아', '이런 미친 짓을 해보는 것도 뭐 나쁘지 않아'라고 자신을 속였었는데 다 지나고 보니 그냥 상황에 숟가락 하나 얹어서 손쉽게 죽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아래 상황들은 내가 했던 짓들의 일부인데 정말 신기할 만큼 아무 일도 안 생겼다. 그 당시 도와줬던 사람들 하나하나가 은인이다.


-일본에 간 친구와 나는 따로 출발했고, 에어비앤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친구 일행은 좀 늦게 도착하는 상황이었으며 집에는 나와 에어비앤비 주인 둘 뿐이었다. 그는 나한테 슈퍼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의 차에 따라 올랐다. 이토시마라는 무지막지한 시골이라 집에서 슈퍼까지 차로 30분 넘게 걸렸는데 집주인이 간다는 슈퍼는 안 가고 자신의 또 다른 집을-차 안에서- 손가락질하며 자긴 원래 저기 산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내 이성교제 여부를 물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려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고민한 걸 보면 살고 싶긴 했나 보다. 아무튼 그 후로 다시 20분 정도를 달려 간다는 슈퍼를 가긴 했다. 그리고 집에 오니 친구 일행이 와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 왔네'라고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노드스트롬 랙에 갔다가 숙소에 갈 때(이미 어두웠다) 심심함에 그만 아무 버스나 타볼까 생각했다. 나는 혼자였고 손에 많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어쩐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많이 있는 버스에 타게 되었는데 나와 같이 버스를 탄 중년 부부가 어쩐지 나를 주시한다 싶더니 가출 청소년 대하듯 '너 어디로 가야 하니?'라고 물으며 내 숙소까지 같이, 맞는 버스를 찾는 것부터 그 버스정류장에서 숙소로 갈 때까지 같이 가주었다(25살 때였다).

-똑같이 샌프란시스코 여행길에 산소 봄베로 호흡을 하는 어떤 남자가 내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고, 한국에 관한 추억을 말해주면서 비타 코코(코코넛 워터)와 귤 두 개를 주었다. 버스에서 내린 후에는 비타 코코를 버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버리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서 그냥 마셨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어서 남은 여행도 잘했고 비타 코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코넛 음료가 되었다. 남자는 평범한 좋은 사람이었다. 당시엔 내 안전을 모두 희생한 대가로 그걸 증명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버스 안에서는 안 마셨잖아?'라고. 아무튼 바보였다.

모르겠다. 나는 뭐가 그렇게 슬펐고 뭐가 그렇게 화가 났고 왜 나를 부수고 싶었는지, 자신을 쳐내고 떠미는 데에 바빠서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모든 게 너무 늦지 않아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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