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번째

놈의 눈을 봐서는 안돼

by 체리

비가 많이 오고 있다. 장마가 시작한 첫날에는 몸이 온통 무겁고 내 몸 같지 않아서 겁이 좀 났었다. 하지만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걸으면서 생각을 해 보니 나는 비가 많이 올 때면 늘 일어나기를 힘겨워했고, 장마 초반 며칠은 적응할 때까지 몸이 무거웠다. 작년 장마철에는 내가 한국에 없었고, 우울증을 겪고 나서는 매일이 힘들었기 때문에 잊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유를 찾은 순간 불 꺼진 방에 햇살이 비치듯이 마음이 따뜻해졌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이유와 형체 있는 것들은 안심을 선사한다. 우울증이 생긴 후로 얻은 가장 큰 발견일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있어서 쓰레기 같은 날이 이유 없이 쓰레기 같은 날보다 훨씬 낫다는 것. 물론 그놈이 그놈이지만. 운동은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우울증을 앓는 동안 생존을 위해 해야 하는 일과 내가 좋아서 하는 일 모두 생산성이 많이 떨어졌다고 느꼈는데 요즘은 제법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올해 초의 나는 브린텔릭스 때문에 육지에서도 통통배 위의 멀미를 느끼며 변기통을 붙들고 어쩔 줄을 몰랐는데. 그때의 나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너는 하고 싶은 일도 하기 싫은 일도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냥 그렇다고. 굳이 뭘 해야 할 필요 없다고. 너는 그대로라고. 물론 이런 말을 한들 그때의 내 귀에는 안 들어왔을 것 같지만. 예의상 고맙다고 하고 다시 변기통 앞에서 질질 침을 흘리며 메슥거림이 사라지기를 기다렸겠지 아마..


그럼 근황 얘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다시 예전 얘기로 돌아가 보자!

오랜 기간 동안 우울증과 나의 관계는 공포영화 속 인물과 귀신의 관계 같았다. 내가 우울증을 의식하는 순간 놈한테 힘을 실어줄 것만 같았고, 그래서 우울증이란 놈한테 이름을 줘서도, 아는 척을 해서도 안될 것 같았다. 왜 귀신 얘기들 중에는 '절대 귀신이 보여도 당신 눈에 그들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려선 안 된다'는 구절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 나는 우울증에 시선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고, 아예 없는 존재 취급을 했다. 진짜 귀신을 향한 대처법이라면 이게 먹힐지도 모르겠지만 상대는 병이다! 병이 어디 의지를 가지고 찾아오던가. 병을 무시한다고 그것이 내게 흥미를 잃고 어디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존재였더라면 암센터는 왜 있고 수많은 의료 업계 종사자들은 왜 있겠는가. 나는 병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무시당하고 버려진 것은 나 자신이었다.


최근에 싱가포르 친구가 조던 피터슨(Jorden Peterson*맨 아래 문단을 봐주시길)의 유튜브 영상을 보내주었다. 그는 영상 서두에서 '지금의 삶이 당신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지, 혹은 당신이 우울증을 앓고 있는지 분리해서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고 말했다. 사실 둘 다일 수도 있지만. 일단 지금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소화하기 어렵고 힘겹기 때문에 우울한 것과 우울증을 앓는다는 것 두 가지는 다르므로, 스스로의 우울증을 진단할 때 본인의 우울이 어느 쪽에 해당하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한테 고통을 준 것도 그런 부분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원하던 해외 취업이라는 목표를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이룬 상태였다. 아버지와 생활공간을 분리한다는 것 역시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바라던 목표들이 이루어졌고, 또 지금 내 생활에 이렇다 할 문제가 없는데 이렇게 우울하다는 건 내가 어딜 가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이란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왜 나는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지?'라는 일그러진 죄책감 때문에 더 내가 앓고 있는 증상을 인정하기 싫었다.

나는 감정적으로 고통을 안겨주는 문제가 발생하면 보통은 그것을 마주하는 편이었지만, 그것들이 일으키는 후폭풍에 대해서는 거의 방치하거나 어디 깊은 곳에 처박아버리고 문을 걸어 잠그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이는 마치 국가정책처럼 소급 적용되지 않는 탓에, 내가 변하기 전, 2015년 이전에 발생한 일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방치나 무시로 일관한다. 내가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파내어 해결하려 하는 일들은 내가 변한 후의 일이거나, 아니면 너무 자주 얘기해서 이젠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을 만큼 무뎌진 사건들일뿐이다.


나는 많이 변했고, 또 변하고 있다. 하지만 완벽한 치료-라는 게 있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안 한다- 의 전제조건이 과거와의 완전한 직면이고 인정이라면 솔직히 말해 거기까지는 자신이 없다.


* 글쓴이의 첨언: 안녕하세요 지금은 2019년 1월입니다. 위 글을 쓸 당시에는 몰랐지만 조던 피터슨은 여러 면에서 저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더군요 일단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겨울 왕국이 디즈니의 프로파간다라는 이상한 말을 했고요, '개인적으로 나는 여성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조차 않는다, 까놓고 나는 그들이 집에서 애나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In fact, I don't even think women should even work at all, They should stay home and make babies.)'라는 말까지 했더군요 글쎄 조던 당신은 틀렸어, 나는 돈을 많이 벌어서 탕진잼이나 할 거라고 이 끔찍한 인간아! 어제는 만화책을 열두 권이나 샀다고! 아무튼 저런 사람인 줄을 모르고 그의 일면만 봤던 옛날이 부끄럽습니다.


* 그리고 2019년 6월에 다시, @huns 님의 지적으로 제가 위에 첨부한 링크가 가짜 뉴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글을 쓴 점이 더 부끄러워지네요. 가짜 뉴스는 'Medium' 이라는 매체의 '조던 피터슨이 우리 시대 최악의 지성인인 8가지 이유' 이며, 겨울 왕국이 디즈니의 프로파간다라는 구절은 정식 인터뷰를 출처로 하고 있습니다. 다음부터 더 신중하게 글감의 진위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겠네요. 죄송합니다! 문제가 된 Channel 4의 전체 대담 기록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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