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 5.8km 산책과 등산 사이
제주에선 어디서든 한라산이 보인다(한라산이 안 보이는 동네가 딱 두 군데 있다고 책에서 봤는데 어딘지 적어놓질 않았다). 그 외에는 어디서든 한라산이 보이고, 제주 하면 한라산이 연관되어 자동으로 떠오를 정도로 제주의 상징은 한라산이다. 제주에 둥지를 잡고 있는 존재라면 한라산의 그늘 속에 들어있다. 요새는 높아지는 고층 건물로 한라산이 시야에서 가려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한라산에 올라보면 왜 '하늘산, 한울산' 은하수를 잡아당기는 산인지 알 수 있다. 한라산의 원래 이름이 하늘을 뜻하는 '한울산'이었다. 느긋한 순상화산으로 별로 높아 보이지 않지만 막상 들어가서 올라가 보면 해발고도 표시석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렇게 땅보다 하늘에 가까워진다. 구름이 지척이고, 구름 속에 들어가고, 구름을 발 밑에 두게 된다.
"와 땅보다 하늘에 더 가깝네"
어느새 하늘 속에 들어와 있다. 루피가 간 하늘섬이 바로 이곳이다.
도시에 살며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몇 번인가 되묻는다. 도시에, 땅에 다리를 붙이고 하늘을 올려다만 볼 것인가. 하늘을 만지러 가자. 하늘을 가까이에 품으러 가자. 하늘을 잡으러 가자. 구름 위에서 방방 뛰러 가자. 한라산으로.
제주에 와 본 적이 세네 번뿐이니 제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제주 북서쪽에 숙소를 잡아놓고 서귀포 하효동으로 산록도로를 이용하여 매일 왕복 2시간 거리를 이동하며 다이빙을 했다. 그런데 오고 갈 때마다 갈색 표지판에 "영실"이 보였다. 영실 뭔가 들어봤는데, 영실이 뭘까? 제주에 대해 발톱의 때의 때만큼도 모르면서도 '영실'이라는 단어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니 그만큼 영실은 한라산을 대표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초딩 때부터 끼고 봤더니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님은 청장님이라는 호칭보다 그냥 아저씨 같다. 그때도 이미 교수님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아빠 친구, 아빠 후배 정도의 느낌이 난다. 옛날이야기를 해줘서 가끔 봐도 친근한 아저씨 이미지이다. 어릴 땐 너무 멋있고 나도 이렇게 글 쓸 줄 알았으면 좋겠다 할 정도로 감탄하며 좋아했던 책인데 컬러판이 나와 새로이 봤을 땐 나이 든 만큼 좀 더 이해하며 읽지만 감탄은 그에 비해 줄어들었다. 아마도 내가 '영실'이라는 단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에서일 것이다. 이 책에서 유홍준 아저씨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딱 한 군데만 꼽으라면 바로, 영실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영실은 왜 영실일까? 그 이름은 영산에서 비롯했다.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과 모습이 비슷하다 하여 영실이라고도 하고, 신령이 살 만한 곳이라는 뜻으로 영실(靈 신령 령, 집 실室)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불교의 느낌을 가득 담았다면 후자는 제주의 느낌을 가득 담았다. 신화의 나라 탐라답다.
제주에는 영주 10경(瀛州十景)이라는 게 있다. 제주에서 경관이 뛰어난 열 곳을 조선 말기 제주의 지식인 매계 이한우가 시적인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다.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경 성산일출 (城山日出) - 성산의 해돋이
제2경 사봉낙조 (紗峯落照) - 사라봉의 저녁노을
제3경 영구춘화 (瀛邱春花) - 영구(속칭 들렁귀)의 봄꽃
제4경 정방하폭 (正房夏瀑) - 정방폭포의 여름
제5경 귤림추색 (橘林秋色) - 귤림의 가을빛
제6경 녹담만설 (鹿潭晩雪) - 백록담의 늦겨울 눈
제7경 영실기암 (靈室奇巖) - 영실의 기이한 바위들
제8경 산방굴사 (山房窟寺) - 산방산의 굴 절
제9경 산포조어 (山浦釣魚) - 산지포구의 고기잡이
제10경 고수목마 (古藪牧馬) - 풀밭에 기르는 말
영주 10경 중에 하나인 '영실기암'을 바로 한라산 영실 탐방로에서 볼 수 있다.
# 2021년 7월 21일 5시 20분 ~ 10시 (4시간 40분)
# 올라가기 : 영실휴게소 해발 1,280m 5시 20분 ~ 해발 1,400m 5시 40분 ~ 해발 1,600m 6시 25분 ~ 2.1km/5.8km 지점 6시 30분 ~ 윗세족은오름 6시 45분 ~ 윗세오름대피소 1,700m 7시 10분 ~ 남벽분기점 5.8km/5.8km, 해발 1,600m 8시 (2시간 40분)
# 내려가기 : 남벽분기점 8시 10분 ~ 윗세족은오름 9시 10분 ~ 영실휴게소 해발 1,280m 10시 (1시간 50분)
영실로 올라가서 어리목이나 돈내코 탐방로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주차를 해놓았기 때문에 영실로 올라갔다 영실로 내려온다. 처음으로 만나는 한라산 탐방로들은 모두 올랐던 길로 내려왔다. 오를 때와 내릴 때 모두 다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실 탐방로는 한라산의 서남쪽을 가로지른다. 성판악이 동쪽에서 관음사가 북쪽에서 돈내코가 남쪽에서 오른다면 서쪽의 코스가 바로 영실이다. 나에게 영실 탐방기는 덩실덩실 영실 영실이었다. 발걸음도 가볍고, 눈도 호강하며, 하늘 위에 올라가 신령을 만나고 오는 덩실덩실 길이었기 때문이다.
해발 1,000m의 영실 관리사무소는 주차비를 내는 곳이다. 이곳에 주차하면 안 되고 계속 차를 타고 올라와서 해발 1,280m에 위치한 영실휴게소에 주차해야 한다. 영실 관리사무소에서 출발하면 편도 3시간 15분, 영실휴게소부터는 편도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고 사이트에서 소개된다. 영실 관리사무소에 주차하면 약 45분 그리고 2.5km를 더 걸어야 한다. 물론 등산을 위해서 걸을 수 있지만 옆에 차가 지나가는 길을 40분 걷는 것보다 한라산 숲 속에 들어가서 40분을 보내는 게 더 좋은 산행길일 것이다.
전날 폭염주의보에서 고작 녹남봉을 오르다가 심박수 올라 죽을 뻔했기에 새벽 네 시 알람에 살짝 고민했다. 하지만 유홍준 아저씨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던 영실을 맑은 날 가고 싶어서 몸을 일으켰다. 새벽 5시 20분 아직 어두운 시간. 영실휴게소를 통과하여 영실 탐방을 시작한다. 걸으면서 헤드랜턴이 왜 필요한 지 알았다. 매 등산 때마다 등산 장비의 필요성과 쓸모에 대해 깨닫는다.
영실 탐방로는 영실휴게소에서 시작하여 편도 5.8km의 산행길이다. 시작은 바로 영실계곡이다. 유홍준 아저씨의 설명에 따르면 영실(靈室)의 室이 들어가는 이름은 계곡을 뜻하는 것으로 옛 기록에는 영곡(靈谷)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육지의 산처럼 졸졸졸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오른다. 나무 숲에 뒤덮여 어둑어둑한 길을 걷는다. 올라가다 보면 나무 사이로 병풍바위가 빼끔 보인다. 가려져서 멀리서 봐도 멋있다. 살짝살짝 보이는 병풍 바위가 이리로 오라 손짓한다.
"여기가 바로 신령이 사는 곳이야~"
숲길을 빠져나와 앞을 보면 영실기암이요, 뒤를 돌면 제주 풍경이요, 아래를 보면 폭신한 한라산의 숲이요, 위를 보면 새벽빛을 받은 꽃잎 모양 구름이다. 볼 것이 너무 많아 눈이 팽팽 돈다. 너무 멋있어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서쪽이라 일출을 볼 수는 없지만 멀리서 새벽의 기운이 몰려오는 이 시간, 이곳에 있음은 가히 천국이다.
등산 경험이 많지 않지만 제주에서 한라산을 오르내리며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좋은 게 또 있을까?' 하며 신기해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괴로운데 즐거움과 만족, 행복이 그 괴로움을 이기는 한라산 산행길이다.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좋은 것'을 생각해내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형제섬과 가파도, 마라도까지 다 보인다. 쏟아질 것 같은 위엄을 자랑하던 산방산은 아주 아기처럼 귀엽게 보인다. 남쪽으로 범섬이 보이며 서쪽으로 수월봉, 당산봉 그리고 막내아들 차귀도까지 보이더니 더 올라가면 비양도까지 보인다.
병풍바위는 이름을 고민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용암이 식으면서 갈라진 수직적인 느낌이 주는 위세가 대단하다.
엄마인 설문대할망이 들어간 죽을 먹어버린 499명의 아들은 엄마가 사랑했던 제주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기로 결심하고 한라산 영실에 들어가서 오백장군이 되었다. 마지막 한 명 막내아들은 엄마를 먹은 형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서 한라산과 멀리 떨어진 용수포구로 가서 차귀도가 되었다는 전설 속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영실 오백장군이다. 오백나한이라고도 하는데 이 역시 불교가 한라산에 묻어 생긴 이름이다.
병풍바위를 향해 올라가면서 앞과 뒤의 경치에 취해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곧 병풍바위에 닿는다. 내가 병풍바위 위에 있는 줄도 모르게 경치를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새 병풍의 날을 지난다. 병풍의 앞쪽으로 튀어나온 오백장군들이 더욱 늠름하게 보인다.
나무 데크로 이어지는 병풍바위와 오백장군의 자태를 보다 보면 구상나무 숲이 나타난다. 조금 더 지나면 경사는 낮아진다.
여기서 한라산을 낑낑 기어오른 해와 눈을 마주쳤다. 해가 뜬 지 1시간도 넘게 지난 6시 35분. 동쪽 바다에서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을 태양이 백록담까지 올라오는 데 오래도 걸렸구나.
구상나무 숲을 지나면 선작지왓이 나타난다. 백록담을 담고 있는 두무악의 절벽이 원경에 자리하고, 중경에 자연이 만들어놓은 오름의 곡선이 있으며, 가까이엔 해발 1,600m의 초원의 푸르름이 위치한다. 초원의 부드럽고 수평적인 느낌과 두무악의 거칠고 수직적인 느낌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멋진 초원을 '선작지왓'이라고 부른다. '선'은 서있다는 뜻이고, '작지'는 조약돌, 작은 돌멩이를 뜻한다. '왓'은 제주어로 '밭'을 뜻한다. '선작지왓'의 이름을 풀이하면 '작은 돌이 서 있는 밭'이다. 한라산 고원 초원지대에 키 작은 관목류가 넓게 펼쳐진 이곳은 명승 제91호로 지정되어 있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이곳을 가득 메워 장관을 이룬다고 하니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다 찾아와 보고 싶은 곳이다.
이곳에는 세 개의 오름이 자리하고 있다. 윗세오름은 어떤 한 오름의 이름이 '윗세'인 것이 아니라 '위에 있는 세 개의 오름'이라는 뜻이다. 그 세 개의 오름은 각각 이름이 있다. 붉은오름, 누운 오름, 작은 오름이 그것이다. 실제로 보면 이름을 잘 지었다 싶다. 작은 오름은 작고, 누운 오름은 오름일까 싶을 정도로 애~매 하게 누워있고, 붉은오름은 붉다.
해발 1,700m에 위치한 윗세오름 대피소에 7시 10분에 닿았다. 1시간 50분 동안 5명 정도의 사람을 본 것 외에 계속 혼자 한라산을 즐겼는데 대피소에 그래도 10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다. 어리목 탐방로를 통해 올라온 사람들과 영실 탐방로를 통한 등산객들이 한 군데 모이기 때문에 꽤나 북적일 것 같은 곳이다. 한라산의 한적한 분위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쉬지 않고 바로 출발하였다. 남벽순환로를 따라 1시간을 가면 남벽 분기점에 도달할 수 있고, 돈내코 탐방로로 하산할 수 있다.
윗세오름 대피소 이후로 남벽분기점으로 가는 길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이상했다. 윗세오름 대피소엔 사람이 있는데 여기는 한 명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가? 여기가 원래 가면 안 되는 길인가? 원래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끝내야만 하는 건가? 그렇다면 돈내코 탐방로로 하산할 수 있다는 말은 틀린 거잖아? 하는 의심이 자꾸 생겼다. 그 와중에 노루가 계속 짖어대서 이거 무슨 곰이 사는 건가 하는 두려움이 덜컥 올라왔다. 이때 처음 들은 이 짐승 소리가 노루인 것은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찾아보고 알았다. 선작지왓 전체에 들릴 것 같은 큰 소리였다.
이 길은 백록담을 담고 있는 두모악을 서쪽에서 남쪽까지 위로 올려다보며 관찰할 수 있다. 대체로 어리목이나 영실로 올라와서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어리목이나 영실로 내려가는 코스가 일반적인 듯하다. 남벽분기점으로 가는 길은 매우 한산하면서 백록담을 담고 있는 절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좋다. 백록담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게 좋은 줄만 알았는데, 찰방 댈 백록담을 상상하면서 물그릇의 겉모습도 이렇게 멋있다니! 이 길의 단점은 단 하나. 울퉁불퉁한 돌길이 걷기 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백록담의 남쪽 암벽 일부가 붕괴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뭔가 무너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찾아보니 올해 3월 발생한 현상이라고 한다.
https://www.khan.co.kr/local/Jeju/article/202105311531001
오전 8시 남벽분기점에 도착하였다.
남벽분기점을 찍고 다시 뒤를 돌아 아래론 서귀포 풍경을 위로는 두모악 풍경을 구경하며 신나게 내려간다. 8월 돈내코 탐방로를 이용하여 남벽분기점을 왔지만 구름 때문에 두모악 남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때 봐 둔 것이 다행이다. 제주의 여름 날씨가 이렇게 구름이 가득한 줄 알았으면 5월에 한라산을 열심히 다니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제주에 대해 하나도 몰랐기 때문에 발생하는 아쉬움들이 많다. 숙소 위치 선정이나, 탐방할 곳들에 대한 스케쥴링과 같은 것들 말이다.
탐방로를 벗어나 방애오름 능선을 걷는 두 사람을 발견하였다. 선작지왓이나 여러 오름들 등 딴 길로 새기 쉬운 지형 탓에 탐방로를 벗어나지 말라고 한국어, 중국어, 영어, 일본어로 방송이 계속 나오는 데도 이렇게 딴 길로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 보이지 않았지만 부디 공식적 인가를 받고 가는 분들이길 바란다.
멀리 마라도와 가파도가 보인다. 여기서 훌쩍 뛰어서 바다로 들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설문대할망이 잠시 빙의된 건가. 그냥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새파란 제주 바다가 아름답고, 그 위에 얹힌 다양한 구름들도 아름답다.
윗세오름 대피소를 순식간에 지나 윗세족은오름을 지나 선작지왓을 떠나는 위치가 되어 뒤를 돌아 다시 한번 두모악을 눈에 넣는다. 아까 본 거랑 또 다른 느낌이다. 하루에도 이렇게 다른데, 매일은 얼마나 다르고, 계절마다는 또 얼마나 다를까? 계속 계속 보고 싶은 풍경이다.
새벽에 본 것보다 더 쨍한 느낌을 주고 있는 영실기암도 좋았다. 그새 나무가 좀 더 자란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 10시 정각. 1,280m 영실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편도 2시간 반 걸리는 한라산 영실 탐방로는 등산이라기보단 산책에 가까워 성판악 코스나 관음사 코스보다 훨씬 수월하다. 돈내코 탐방로보다도 쉬운 느낌이고, 피톤치드 5000% 로 계속 숲길이 이어지는 돈내코 코스보다 내려다보는 제주 풍경이나 영실기암 등 볼거리도 풍부하다. 유홍준 아저씨의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의견에 적극 동의하기엔 아직 섣부른 제주 새내기이지만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가는 영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