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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Sep 28. 2021

가장 쉽고 편하다는 : 한라산 어리목 탐방로

나는 관음사 코스보다 힘들었다

가장 쉽고 짧아서 한라산을 찾는 이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다는 어리목 탐방로를 가본다. 


제주에 머물 때 한라산은 항상 주중에 갔는데, 제주를 떠나니 주말에 가게 된다. 그리고 이전까지 모두 여름의 한라산을 봤다면 이번엔 여름과 가을 사이의 한라산이다. 공기와 하늘은 가을이지만,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아 완연한 '가을'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 



제주의 밤 : 별빛이 흐른다~ 라라랄라라라라


9월로 계절과 달이 바뀌었기 때문에 한라산 탐방 시작 시간이 5시였던 데서 5시 30분으로 늦춰졌다. 4시 40분쯤 출발하여 1100 도로를 타고 어리목 주차장으로 간다. 물론, 이번에도 노루 두 마리가 도로에서 새벽 산책을 즐기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노루보다 대단했던 것은 바로 별이었다. 8월에 한라산을 갈 때는 저 멀리 해가 밝아오는 여명의 빛에 감탄했건만, 9월 한라산 가는 길엔 쏟아지는 별에 감탄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이라니. 차가 없이 새카만 도로에서 잠시 서서 별을 보았다. 하지만 별을 보기 위해 라이트를 꺼버리는 게 너무 위험하게 느껴져서 오랫동안 볼 수 없었다. 

'1100 고지에서 보자!' 


1100 고지에 도착해서 skyguide 어플을 켜서 한참을 별구경을 했다. 

'지금 한라산이 문제가 아냐.'



노인성이 유명한 제주, 별 보기 좋다는 제주에서 지난여름에 제주시 별빛누리공원에 별 보러 갔다가 구름 때문에 별보기 프로그램은 취소되었고 이상한 멀미 나는 4D 만 타고 나왔던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해리포터에서 가장 좋아했던 시리우스. 큰개자리의 일부인 시리우스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하지만 공단이 들어선 집에선 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 해발 1,100m의 제주에선 시리우스가 저렇게 반짝반짝 잘 보인다. 오늘도 감동을 주는 탐라이다. 



한라산 어리목 코스 탐방기


2021년 9월 22일 5시 40분 ~ 10시 5분 (4시간 25분)


올라가기 : 어리목탐방로 입구 해발 970m 5시 40분 - 어리목 계곡 나무다리 5시 55분 - 해발 1,100m 6시 7분 - 해발 1,200m 6시 20분 - 해발 1,300m 6시 32분 - 해발 1,400m 6시 49분 - 사제비 동산 해발 1,423m 6시 50분 - 해발 1,500m 7시 10분 - 만세동산 전망대 해발 1,606m 7시 25분 - 윗세오름 대피소 해발 1,700m 4.7km/4.7km 8시 (2시간 20분)


내려가기 : 윗세오름 대피소 8시 45분 - 해발 1,600m 9시 - 해발 1,500m 9시 13분 - 해발 1,400m 9시 25분 - 해발 1,100m 9시 45분 - 어리목 목교 9시 55분 - 어리목탐방로 입구 10시 5분 (1시간 20분) 



해발 1,423m 사제비 동산까지 : 힘들다!


어리목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너무 어두워 하나도 보이지 않아 화장실을 찾아 한참 동안 헤맸다. 5시 40분. 어리목 탐방을 시작한다. 어리목 계곡을 따라 500m를 가면 어리목 목교가 나온다. 그리고 해발 1,423m 사제비 동산까지 빡세게 올라간다. 



서울 가고 며칠 운동 안 했다고 가장 쉽다는 어리목 탐방로가 가장 힘들었다. 제주에 있을 때 올레길과 각종 오름으로 단련했던 폐와 심장이 주저앉아버렸다. 내가 어리목 탐방로 등급 구간을 잘못 봤나 보다. 이 구간이 가장 쉽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사제비동산까지 약 해발 500미터를 더 오르는데 와 너무 힘들었다. 

‘이게 탐방로 쉬움이라고? 이따 어려움 나오면 큰일 났다’


너무 힘들어서 핸드폰을 켜서 다시 보았다. 

'이게 쉬움이면 못가 못가' 

다행히 탐방로 등급 어려움이었다. 즉, 어리목 나무다리에서 사제비 동산까지 1.9km, 안내되기로는 55분 걸리는 구간이 바로 ‘어려움’ 등급이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원래 그런 거야 란 말은 응원이 되지 않는 말이지만 함께 어렵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공감받은 기분에 위로받는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아 보이는데 나는 죽을 것만 같을 때가 더욱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지름길이다. 



열 걸음 가고 쉬고 열 걸음 가고 쉬고를 반복했다. 이전에 오를 땐 거의 안 쉬고 다녔는데, 약 보름간의 ABR 이 이렇게 만들다니. 꾸준한 운동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깨닫는다. 와 죽겠다 하고 쉬면서 심박수를 재면 180이었는데, 이번엔 170, 160대이다. 정말이지 다리 근육뿐만 아니라 심장 근육이 빠져버렸다. 


전말 마신 술, 그 전날 마신 술, 그 전전날 마신 술, 그 전전전날 마신 술이 원인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순식간에 근육이 빠지고, 순식간에 나약해진 신체를 적나라하게 체험한다. 서울에서 운동하지 않은 것을 탓하며, 술을 탓하며, 나를 탓하며 즐거워야 할 산행이 조금 우울해졌다. 더군다나 초저녁에 시작하여 가게 문 닫을 때까지 마셨던 술을 배출해낼 시간적 여유가 없이 새벽부터 등산을 시작했기에 장이 술독으로 부글거리기 시작하고선 더욱 그랬다. 악명 높은 관음사 코스를 올라갈 때도 힘들지만 흥겹게 올랐건만 고작 어리목 코스를 올라가면서 ‘지금이라도 뒤돌아 내려갈까?’라는 생각이 들다니


그래도 되돌아갈 순 없다. 이렇게 좋은 날, 새벽같이 일어나서 왔고, 주차도 잘했고, 등산도 시작했는데. 이 모든 걸 뒤로하긴 너무나 아깝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어려움’ 구간을 올라간다. 쉬면서 올라가는 게 자괴감은 좀 들지만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설 때마다 중경에 있는 나무들까지 관찰하고, 그러면서 또 멋진 나무를 발견한다. 멋진 나무들을 구경할 맛이 나는 게 이 구간에는 한라산의 낙엽활엽수림대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사제비동산 ~ 만세동산~영실 대피소까지 : 쉽다! 


드디어 힘든 게 끝났다. 나무데크가 깔린 사제비 동산이 나왔다. 요동치는 배를 붙잡고 잘 참았다. 

‘이제는 좀 쉽겠구나.’


한라산에 말을 방목할 때 훌륭한 먹이가 돼주었던 조릿대가 국립공원 내에서 방목이 금지되고 점점 높은 해발고도까지 치고 올라오고 있는 중이다. 이는 한라산 식생에 영향을 주어 키 작은 초본류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고 한다. 



숲을 빠져나옴으로써 이제 탁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계속 뒤를 돌아 제주 바다를 확인한다. 가까이엔 오름이, 멀리엔 바다가 펼쳐진다. 비양도가 랜드마크가 되어주어 주변이 어딘지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사제비 샘은 식수에 적합하다는 안내판이 있었다. 여름의 한라산 등산과는 달리 땀이 거의 나지 않고, 또 배 아픈 것 때문에 물이 부족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셔도 된다는 말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한라산의 자연수를 시원하게 마셨다. 사제비 샘은 비가 오지 않으면 마르는 때도 있다. 


해발고도 1,600m를 지나면 만세동산이다. 이곳에서부터는 백록담을 담고 있는 두모악이 잘 보인다. 아주 웅장하고 가파르다. 만세동산은 백록담 화구벽의 북쪽에 있다. 만세동산 전망대에 올라 한참을 구경한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헬리콥터 구경


이번에는 남벽분기점까지 가지 않았다. 영실 코스 때와 돈내코 코스 때 봤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올라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오후 2시 30분에 차귀도 유람선이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에 차귀도 트레킹도 해야 했기에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끝내기로 했다. 그렇지만 내려오면서 어승생악을 들렀다 갈까 하는 고민이 살짝 들기도 했다. 왜냐하면 날씨가 너무나 쾌청한 가을 하늘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날씨는 낭비하면 안 돼.'

하는 강박증이 또 도졌다. 


어리목 탐방로는 남벽분기점까지 간다면 총 6.8km 길이이며, 편도 3시간 소요된다고 안내된다. 나는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남벽분기점까지 가는 평탄한 1시간 2.1km 길을 가지 않았는데도 2시간 20분이 걸렸으니 보통 2시간 걸려야 하는 길을 얼마나 천천히 왔는지 알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널찍 널찍이 앉아있는데, 헬리콥터가 오니까 다들 위로 올라가라는 안내를 하신다. 헬리콥터 바람이 너무 심해서 짐이 날아갈 수 있으니 위로 가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모자가 날아가버렸다고 직원에게 큰 소리로 항의하는 분도 있었다. 


영실이나 이번에 어리목을 오를 때 헬리콥터가 오가는 것을 여러 번 봤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본격적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자 직원분들이 다급해졌다.

“거기 있으면 안 돼요!!!! 안돼요!!! 옆으로 옆으로!!!”

내가 올라온 어리목 탐방로를 향해 팔을 마구 휘저으며 소리를 지른다. 헬리콥터가 짐을 아래로 대롱대롱 매달고 오기 때문에 고도를 낮춘 상태에선 자칫 잘못하면 등산객의 뒤통수를 가격할 수도 있겠다는 과격한 상상을 해본다.


‘무섭네. 헬리콥터가 다 끝나면 내려가야지.’

헬리콥터는 4번 왕복하였다. 내가 2시간 30분 만에 오른 이곳을 헬기는 10분 안에 왕복한다. 윗세오름 대피소는 무언가 공사 중이었고, 공사 물품들을 나르는 듯하다. 



내려가면서는 한라산 레일 기차 구경


남벽분기점까지 가서 돈내코 코스로 내려갈 수 있고,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영실 코스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이번에도 역시 어리목 코스로 내려간다. 


화장실도 가고, 맛있는 주먹밥도 먹고, 헬기가 4번이나 왕복하는 것을 다 본다고 많이 쉬고, 쌩쌩해져서 내려간다. 45분이나 쉬었다! 시작할 때는 아예 어두워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을 재확인하며 내려갈 예정이다. 



내려가면서 사제비 동산까지 오르는 길에 거칠어진 등산객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또 위로받았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어.’ 누군가의 숨소리가,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위안이 됨을 배운다. 


내려오면서 또 재밌는 구경을 했다. 등반로 옆에 항상 레일이 깔려있었는데, 무언가 물건을 옮기는 등의 용도로 쓰일 거라는 짐작만 했지 실제로 사용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몇 번이나 한라산을 가면서도 볼 수 없었던 레일이기에 ‘고장 나서 안 쓰는 건가? 아니면 정말 정말 위급할 때만 쓰는 건가?’ 하는 의문도 가졌다. 그런데 이번에 내려가면서 두 번이나 보았다! 그동안은 한 번도 못 봤는데. 그때와 오늘의 차이는 주중과 주말이라는 점이다. 주말에 아무래도 등산객이 많으니 직원들이 근무하는 건가? 궁금한 점만 가득해졌다. ‘순찰’이라고 달린 배낭이 실려있었다. 아마도 직원들이 이동하는 수단인가 보다. 



올라올 때는 어두워서 못 봤던 풍경들을 보면서 내려간다. 해를 받아 반짝 거리는 어리목 계곡. 이런 모양이었구나! 



10시 5분. 해발 970m의 어리목 탐방로 입구에 도착하여 무사히 어리목 구경을 마쳤다. 관음사 코스보다 힘들었지만 완연한 가을 날씨라 땀도 훨씬 덜 났다. 한여름의 한라산 산행이 얼마나 극한 훈련이었는지 가을에 올라보니 비교가 가능하다. 어승생악은 생략! 단풍 때를 기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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