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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솔 Nov 26. 2022

나에게만 보이는 해시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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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날짜가 다가오니 내 상황을 알릴지 아니면 굳이 알려서 뭐 하냐는 두 마음이 계속 왔다 갔다 했다. 의도적으로 숨길 마음은 없지만 드러낼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 인스타에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나의 일상을 올렸다. 산에도 가고, 맛집에도 다니고, 친구들도 만나는 즐거운 모습. 일상의 나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피드 속의 내 모습 뒤로 투명 꼬리표가 보였다. (#암환자의일상) 나에게만 보이는 해시태그. 



그 모습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많이 안아주고 하나가 됐다고 생각했는데도, 나는 아직 그 아이를 그대로 바라봐 주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사랑한다지만 내 안에 품고 바깥에는 보일 수 없는 아픈 손가락. 어떻게 하면 암을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나를 그대로 완전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에게 여전히 숙제 같은 문제다. 



만약 자식이라고 생각해 보면 이런 거다. 숨기고 싶은 모습이 있는 아픈 아이.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인 나는 아이의 모든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품 안에서 어떤 모습이든 안아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를 굳이 바깥에 내보내려고 하지는 않는 마음. 왜일까? 아이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일까 외부의 시선에 대한 방어일까. 아무래도 후자인 듯하다. 방어. 아이를 지켜주고 싶은 어미의 마음일 거다. 



방어는 진정한 사랑의 행위일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의 사이에서 분별하는 마음이 아이를 내 품의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내게서 분별의 마음을 제거하고 아이의 불완전함 그대로를 완벽함으로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가 세상에 나가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은 어떻게 내는 것일까.



나에게서 암이라는 해시태그를 안 보이게 치우려는 노력 말고, 당당히 암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있는 나로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걸까. 꼬리표를 달고 있던 아니던 나의 존재는 달라지는 게 하나 없는데, 이 작은 경계에서 나는 왜 이렇게 괴로움을 느끼는 걸까. 나는 언제나 나인 걸. 달라지는 게 하나 없는 게 아니라 달라질 게 하나 없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운데. 붙들고 있는 마음 하나가 좀처럼 내려놓아지질 않는다. 



그래도 기쁜 일이라면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곳 어딘가에서는 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나 보다. 요즘엔 가까운 사람들을 하나둘씩 만나 나의 근황을 많이 어렵지 않게 전할 수 있게 됐다. 슬프고 비밀스러운 것을 고백하는 마음이 아닌, 조금은 특별한 감사함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암이라는 존재가 내 삶에 가져다준 예기치 못한 축복들. 



나는 외부 조건에 의해서 달라질 게 없었기 때문에 일상이 유지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파서 병원에 간다고 내가 달라지지 않는다. 수술을 받는다고 내가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지 않는 나를 내가 이상하게 여겨서 혼자 계속 의심하며 나의 정체를 묻기에 혼란스러웠던 것뿐이었다. 이제 보니 꼬리표는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투명한 꼬리표는 내 머릿속에 있었을 뿐이다. 이제야 답을 찾은 내 마음이 편해진다. 병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나는 언제나 나 그대로이다. 조건이 나를 바꿀 수 없다. 새로 알려진 것들 앞에서 기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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