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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Jul 14. 2022

강릉 일기 #1

휴가의 시작

드디어 강릉으로 출발이다. 십수년 만에 처음으로 6개월 안식년을 얻은 나의  번째 계획은 친구의 강릉 별장에서  달간 살아보는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가 은퇴  살기 위해 강릉에 단독주택을   마련하였는데, 코로나 19 덕분에 국가  이동이 어려워서 사실상 줄곧 비어있다. 집이란 모름지기 사람의 손길이 있어야 유지가 되는 . 마당에 잔디는 물론이고 자재도구 역시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면 금방 폐가, 흉가가 된다. 멀리 세종시에 살고 있는 친구의 동생이 시간 나는 대로 와서 집을 돌보고 있지만, 주말에 간신히 시간을 내어 오기에 강릉은 너무 멀고, 교통도 좋지 않다. 그래서 친구는 나에게 종종  집에 와서 쉬었다 가라고 했지만 지금껏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내가  휴가를 얻은 것이다. 나는 일과 가족을 떠나 의무와 책임 따윈 깡그리 잊어버리고 온전히 혼자 자유의 시간을 가져 보려고 한다.

 

얼마나 빨리 떠나고 싶었는지 동네 이마트가 문도 열기 전에 도착했다. 명품 구입을 위한 오픈런도 아니고, 블랙프라이데이 반값 세일을 위한 오픈런도 아니고, 평일 아침 이마트에 오픈 전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일 듯하다. 강릉 집에는 아직 가본 적이 없어서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는 성격의 친구는 "가면  있으니 염려 말고 그냥 "라고만 했다. 반면 나는 플랜 B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라 아침부터 마트에  있다. 강릉도 사람 사는 곳이요, 마트도 시장도 뻔히 있으련만  사야할지 생각도 없이 아침부터 마트를 찾은  자신이 우습기도 하다. 어쨌든 필수품 중에 필수품이라고   있는 햇반, 김치(유통기한 임박으로 반값 세일!), 밀키트  (된장찌개, 제육볶음) 사서 짐을 쌌다.


나의 강릉 생활은 엄밀히 말해 '혼자'는 아니다. 어딜 가나 내 껌딱지인 반려견 클로이가 함께 간다. 벌써 13살을 넘긴 클로이는 내가 입양할 때 생후 7개월이었는데 이미 한번 파양된 적이 있어 분리 불안이 심했다. 게다가 나의 특수한 사정 때문에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세번이나 건넜다. 말이 좋아 국제선 비행기이지, 몸무게 초과로 승객 칸에 타지 못하는 클로이는 어둡고 시끄러운 별도의 동물칸에서 영문도 모른 채 매번 15시간 이상을 견뎌야만 했다. 덕분에 클로이는 13살이 넘도록 분리불안을 극복하지 못했고 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안절부절 못한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내내 나와 함께 지냈으니 그 기간이 클로이에게는 그야말로 호시절이었다. 다행히 강릉 별장에는 널찍한 잔디밭도 있고, 짖거나 뛰어도 이웃에 피해가 되지 않으니 클로이는 다시 한번 생애 행복한 시기를 갖게 될 것이다. 클로이와 함께 장거리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짐을 미리미리 차에 실어 두고 출발 직전에 산책을 시켜 배변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


장거리 운전을 위해 나도 점심을 든든히 챙겨 먹고 출발했다. 내가 있는 곳이 서울에서도 서쪽인 편이라 강릉까지 2시간 40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월요일이고 날씨도 나쁘지 않아서 다행히 교통이 원활하다.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고 성남, 판교 지나는 동안 우리가 교통 편의를 위해 얼마나 땅을 많이 파헤쳤는지 절감했다. 수없이 많은 터널과 지하차도를 거치고야 수도권을 벗어날 수 있었다. 오늘은 한 번도 타지 않은 지하철까지 떠올리며 마음이 무거워 온다. 인간들 편하자고 이렇게까지 자연을 파헤쳐도 되는 것일까? 그냥 이 편리함을 즐기면 될 것을, 나는 왜 이리 생각이 많을까. 이런 점도 이번 여행에서 좀 고쳐 보고 싶다.


수도권을 벗어나 광주, 이천, 여주를 지나고 마침내 강원도로 접어드니 산세가 다르다. 서울에서부터 듣던 SBS 파워 FM과 EBS 라디오 주파수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잡히는 채널이 별로 없다. 간신히 얻어걸린 KBS 라디오에 강원국 작가가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KBS마저 시그널이 잡히지 않을 때 얻어걸린 것은  국방 FM이었다. 역시 강원도라는 생각이 든다.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어린 시절 학교에서 많이 불렀던 동요가 어린이 합창으로 들려왔다. <메아리>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유치환 시인이 작사를 했단다. 625로 폐허가 된 산에 나무를 심자는 노래인데, 내가 어린 시절엔 산이 지금처럼 울창하지 않아서 하늘에 닿을 듯 쭉 뻗은 나무의 사진은 모두 외국의 국립공원에서 찍힌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강원도의 산은 충분히 푸르고, 부럽게 바라보던 외국 사진 속 키 큰 나무들이 즐비하다. 참참 감사하고 뿌듯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기저기 터널을 뚫고 지하철을 까는 와중에도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는 열심히 심었던 거다!


드디어 강릉에 진입했다. 원래는 친구 별장에 가서 짐부터 풀어놓을 생각이었지만, 막상 강릉에 도착하니 마음이 바뀌었다. 재빨리 경포대로 목적지를 정정하니 시원하게 뚫린 경포로가 펼쳐진다. 하늘과 호수가 맞닿아 있고 가로수들도 사이좋게 일정한 키와 간격으로 늘어서 있다. 얼떨결에 참소리 박물관에 주차를 하고 길을 건너니 경포호를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뻗어있다. 멀리 싱가포르의 마리나베이샌즈를 닮은 스카이베이 호텔이 보인다. 신이 나서 기념사진을 찍고, 클로이와 함께 경포대 바다를 향해 걸었다. 날이 덥고 흐려서 땀이 비오듯 했지만,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이른 여름이지만 경포 바다에는 벌써 젊은이들이 제법 나와서 발을 담그며 논다. 날이 아무리 흐려도, 젊은이와 바다가 만나면 즐거운 비명이 끊이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시원한 물을 사서 클로이와 나눠 마신 후 주차된 차를 향해 돌아왔다.

경포호 주변을 산책하는 클로이와 잔뜩 흐린 경포대 해수욕장.

강릉의 시원한 풍경을 즐기며 다시 30분 정도 드라이브하니 마침내 별장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외지지 않고, 마을이 아주 예쁘다. 다양한 꽃과 나무를 잘 가꾸는 이웃들 덕을 보며 여기 그냥 살고 싶을 정도다. 거미줄 친 대문을 힘겹게 열고 클로이와 함께 입성했다. 생각보다 마당에 잔디 상태도 좋고, 꽃과 나무도 건강하다. 집안에 들어가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집 구조를 확인했다. 듣던 대로 정말 없는 것 없이 갖춰져 있고, 오래 비어있던 것에 비해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아침에 마트에서 사온 먹거리를 냉장고에 넣고, 집에서 가져온 남편의 맥주 한 캔은 냉동실에 넣었다. 1층에 청소기를 돌리고, 선반에 나와 있는 그릇은 한 번씩 헹구었다. 비로소 여기서 살 준비가 끝났다.


마침내 도착한 별장. 집집마다 정성껏 조경을 하여 갖가지 꽃과 나무가 아름답다.


이마트에서 집어온 된장찌개 밀키트를 보글보글 끓여서 햇반에 김치와 함께 소박한 첫끼 (feat. 냉동실에서 차게 식힌 맥주)를 마쳤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성공적인 오늘의 모험을 보고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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