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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기쁨 Oct 30. 2022

산장에서 먹는 얼큰하고 따듯한 진한 국물

카즈베기에서 해를 보기는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비구름이 정말 나를 따라다니나 싶을 정도로 계속 비만 왔다. 


아침에 눈을 뜨고, 어제와 같이 창 밖 너머로 비가 내리는 걸 확인하고는 이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산장 같이 생긴 이 숙소는 꽤나 옛 스러운 느낌이 나는 곳이었는데, 살짝 꿉꿉한 냄새와 나무 냄새, 그리고 비 냄새가 섞여서 할머니 집에서나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가 났다. 포근한 느낌을 주는 냄새를 나는 사랑했다.


공기가 어제보다 더 차가워졌다고 생각했다.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 눈을 감고 조금 더 잠을 청했는데, 일어 나니 시곗바늘은 12시를 향하고 있었다. 어쩐지 배가 슬슬 고프다 했다. 어제 사온 한국 라면을 흘깃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도시락’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 컵라면이다. 조지아에서 이것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걸을 때마다 끼익 끼익 소리가 나는 마루를 지나 방 반대 편에 있는 작은 주방에 가서 주전자에 물을 넣고 가스불을 켜고 창 밖으로 보이는 산속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뜨거운 물을 팔팔 끌이니 조금 톤이 높은 수증기 소리가 났고 보이는 풍경과 대비되는 소리가 그렇게 좋게 들렸다.  


나는 공기는 차디 찬데 물은 따듯한 온천에 들어가는, 더운 여름날 에어컨을 켜고 담요를 덮는 그런 기분을 좋아한다.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을 들고 실내가 아닌 굳이 쌀쌀한 공기를 맞으러 테라스로 향했다. 그런 기분 때문에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이유를 더 보태자면 테라스에서 보는 전경이 너무 예뻐서였다. 안보다 밖에서,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눈 덮인 산 앞으로 물안개가 진득하니 피어 있었고 그사이로 보이는, 어젯밤에는 보지 못했던 색색의 지붕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가 와서인지 전보다 더 시린, 봄이지만 겨울의 공기를 느끼며, 천장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가만히 풍경을 감상했다. 추운 날에 얼큰하며 뜨끈한 국물을 타지에서 먹을 수 있다니. 라면의 맛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라면을 다 먹고도 따듯한 차를 가져와 한참을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물안개가 번졌다가 다시 생기는 모습을 여러 번이고 지켜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순간에 벅찬 행복감을 느꼈다. 영하를 웃도는 기온 때문에 발이 꽁꽁 어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 정도는 기꺼이 지불할 만한 행복이었다. 


테라스에서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주인아주머니 었다. 이 숙소의 구조는 1층은 주인집 2층은 숙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점심을 먹으려고 준비하시는 아주머니께서 밖에 나가지 않는 나를 보고 말을 거신 것이었다. 


“Do you want Soup 수프 먹을래? 


라면의 국물까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신 터라,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요리해 준 음식을 먹은 지가 오래되었다는 생각에 냉큼 “Yes”라 답했다. 

대답한 후 30분쯤 지났을까,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냄새가 맛있게만 느껴졌다. 냄새를 맡으며 어떤 음식일지 상상을 마음껏 했다. 아주머니께서 가져오신 수프는 난생처음 보는 수프였는데, 토마토 수프에 야채가 많이 들어간 고깃국(?) 같은 느낌이었다. 찻잔이 다 식을 만큼 조금은 추워진 날씨에 몸을 데우려 서둘러 한입을 떴다.


얼큰하고 뜨끈한 국물. 분명 토마토 수프인데 되직하면서도 맑은 그런 국물과 양파의 단맛, 감자가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조차 좋았다.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여러 가지의 채소의 맛과 고기 맛이 더해져 혀가 즐거웠다. 호 불 호가 갈리는 고수는 나에게는 불호 채소였는데, 이번만큼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분명 토마토 수프인데 그런 맛이 나는지. 맛있는 냄새를 맡으며 상상했던 맛과 일치하는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해치워서 인지 아주머니는 한 그릇 더 가져다주셨고, 나는 “good”을 열 번이고 더 말했던 것 같다. 그 말에 웃으며 좋아하시는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표정 덕에 추웠던 몸이 한결 더 따뜻해졌다고 자부한다. 


나중에서야 알고 보니, 그 음식은 조지아 전통 음식 중 하나더라. 꽤나 그리운 맛이라 조지아에 있는 동안 여러 번 가게를 찾았지만, 아주머니가 만든 수프의 맛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원재료에 충실했던 맛. 잊히지가 않는다. 아주 진한 음식이었다. 그런 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될 까, 맛도 맛이었지만 아주머니의 정성이 더한 맛이라 더 진했지 싶다. 누군가 여행을 하며 떠오르는 음식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할 거다. ‘카즈베기의 어느 산골 아주머니의 토마토 수프’라고. 따듯한 국물 덕에 기분이 한결 나른해졌던 비 오는 날의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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