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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광섭 Jan 25. 2019

프라하의 크리스마스

프라하. 87일 세계일주 #3 

   어제 막 크리스마스가 끝난 프라하는 어수선했어요. 천문 시계탑 아래로 즐비한 크리스마스 마켓은 아직 그날의 여운을 가지고 있는 듯 주황색 전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곳곳에 늘어선 트리와 마켓들 그리고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우리는 쉴 만한 카페를 찾았어요.


   해질녘, 아직 햇빛의 여운이 한껏 남아있는 카페에 앉아 우리는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제가 바로 크리스마스였으니, 대화는 자연스럽게 일 년 중 가장 특별한 날. (우리나라에서만) 연인들에게도 가장 특별한 그 날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죠.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무엇하고 지냈냐는 저의 말에, B는 그냥 집에서 쉬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실은 5년이나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불과 몇 주 전에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아. 이번에도 쓸데없는 말을 꺼냈나 봅니다. 그래도 덤덤한 B의 표정을 보고 기왕 이야기가 나온 거 조금 더 용기 내어 물어봤습니다.

 

   B는 그와 5년 동안 서로 후회 없이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둘의 시간엔 서로가 메꿔줄 수 없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하나쯤 있었을 터입니다. 처음엔 사랑이란 말로 이해해주고, 바꾸려 노력했겠지만 반복되는 그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는 순간이 왔다고 했습니다.


나는 여러 번이나 말했는데 너는 바뀌지 않는구나. 

나는 너의 그런 부분을 이해해줄 수 없어. 

네가 바뀌지 않는 다면, 우리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 


   주황빛 전구가 그녀의 얼굴을 반쯤 비추어 주었고, 그녀는 그 기나긴 시간을 지닌 채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오래오래 사귀면, 서로에 대한 마음은 당연히 설렘보단 익숙함으로 바뀐다고. 처음에 한껏 품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의 행동들은, 익숙함과 함께 단점으로 다가온다고. 기나긴 시간을 연인으로 지내고, 설렘이 익숙함으로 바뀔때즈음. 그렇게 다가온 단점을 이해해줄 만큼 서로를 아끼지 못한다면, 그제야 그 인연은 남남으로 바뀌게 되는 것.

 

그 긴 시간 동안 차분히 쌓인 그녀의 한마디는, 짧지만 그 시간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쉽지만 비행기 시간이 다 되어서, 그녀와 헤어지고 얼른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체크인을 하고, 보딩 시간에 맞춰 줄을 섰습니다.


   제 등 뒤로 정말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봤습니다. 한 여자가 남자의 손을 부여잡고 있었죠. 남자는 그날의 날씨만큼이나 차가운 얼굴이었고, 그녀는 일방적으로 그의 손을 부여잡으며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라스트 콜(Last call). 이제 곧 게이트를 닫는다는 방송이 요란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이윽고 그녀는 그의 손을 놓고 저의 바로 뒤에 줄을 섰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머금은 프라하를 뒤로하고, 러시아행 비행기가 하늘길을 걷는 내내, 제 옆에 앉은 그녀는 숙인 고개 사이로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바깥의 공기가 북극의 한기로 가득 찰 무렵, 비행기는 얼어붙은 활주로를 따라 매끄럽게 랜딩을 했습니다. 기장은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로 방송을 했습니다, 이어서 누구보다 유창한 영어로 좀 전의 방송을 다시 했습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는 잘 지내셨습니까. 저는 여러분과 이 크리스마스의 비행을 할 수 있어 정말 좋았습니다. 아끼는 이와 작별의 인사를 하고 이 비행기에 오른 분들도,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가는 분들도 있겠죠.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모든 분들을 축복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기장의 방송이 끝나자 비행기는 너도나도 짐을 찾아 얼른 공항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으로 가득 찼고, 저도 짐을 꺼내려고 일어났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들고, 흐르던 눈물을 삼켰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앉아있을 요량인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그 사려 깊은 기장의 말을 제대로 소화했는지 알 도리는 없었습니다.


얼른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울음을 삼킨 그 눈동자엔, 눈물 대신 덤덤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마 후회 없이 열심히 사랑했을 겁니다. 그 덤덤한 눈동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는 듯싶었습니다.

그들도 연애의 끝자락에 서로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더 이상 극복하지 못한 것일까요? 


Pra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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