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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광섭 Jan 25. 2019

오로라, 신의 영혼

무르만스크. 87일 세계일주 #4

너. 근데 별 보러 간 것 아니야?
사진도 이쁘고 다 좋은데, 별이 없는 게 생각보다 아쉽네.

   그러게요. 유럽에 거리를 걷는 것에 취해서 늘 먹구름에 가려있던 별을 잊었네요. 그래도 별을 보고자 떠난 여행인데. 출발한 지 열흘이 넘도록 별은 손톱만큼도 못 봤네요. 별이 많은 곳을 가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별을 잔뜩 볼 수 있다는데. 음. 별뿐만 아니라 오로라도 볼 수 있다는데.


   오로라라는 말이 머릿속에 들어온 이후로는 당장의 여행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끝자락 어딘가로 미뤄두었던 오로라를 지금 당장 보는 건 어떨까 싶었거든요. 이곳 유럽에서 제 일정에 맞춰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은 러시아 최북단 도시 무르만스크. 북유럽도 선택지 중 하나였지만, 전부 날씨가 안 좋았습니다. 무르만스크는 한국인에겐 생소한 도시일지 몰라도, 이미 많은 외국인들이 오로라를 보러 찾는 곳이었죠.


   그렇게 프라하의 크리스마스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저는 러시아로 향하는 보잉 747기에 몸을 올렸습니다.







와.. 춥네. 내가 지금 북극권에 와있는 거야?

   차가운 북극의 땅 위로 비행기가 부드럽게 랜딩을 했습니다. 도착을 알리는 기장의 방송이 끝난 후 얼른 비행기를 빠져나왔습니다. 그 순간 북극의 한기가 폐를 가득 메웠습니다. 난생처음으로 북극권에 발을 올린 순간이었죠. 택시를 타고 숙소 앞에서 호스트에게 연락을 하니, 이내 건장한 체격의 러시아 남성이 택시로 다가왔습니다. 길고 가는 금빛 머리는 뒤쪽으로 묶었고, 추위에 지친듯한 턱수염이 삐죽삐죽 나와있었습니다.


S : “한국인은 네가 처음이네. 내 flat에 온 걸 환영해. 필요한 건 무엇이든 말하고. 참. 오늘 오로라 보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 행운을 빌게.”
나 : “고마워. 나도 꼭 봤으면 좋겠어. 그거 하나때문에 여기까지 왔거든.”



   겉으로도, 그리고 이내 머릿속으로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깊은 무의식은 그러지 않았던가 봅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은 단 2일. 더군다나 내일은 날씨도 좋지 않고, 태양풍의 강도도 매우 약할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오늘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촉박한 마음이 앞섰죠. 설사 오로라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도전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자 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나요. 오로라 헌팅에 나서기로 한 오후 8시까지 안절부절 침대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습니다. 8시를 조금 넘기자 업체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D : “조금 멀리 나가야 할 것 같아. 여기서 차 타고 100km 정도? 무르만스크는 날씨가 영 안 좋으니 한번 나가보자. 다행히 태양풍은 꽤나 강력하다고 하네. 출발하자”
나 : “알겠어. 준비하고 나갈게”
D : “좋아. 8시 30분까지 내가 너를 데리러 갈게. 메시지 보내면 내려와”


  긴장된 마음을 추스르고, 우리를 태운 은색 스타렉스가 북쪽으로 향하는 동안 같이 온 동행들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과연 내가 오늘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라는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습니다.

불안함에 지친 저는 거짓말으로라도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거란 말을 듣고 싶어 D에게 물었습니다.


나 : “D, 나는 원래 유럽을 여행할 예정이었어. 뒤의 모든 일정을 뒤엎고 여기를 왔지. 오늘 나는 꼭 오로라를 보고 싶어. 네가 생각하기에 볼 수 있을 것 같아?”


D : “음. YEOM. 오로라를 보는 건 그 누구도 확신해줄 수 없어. 우리가 너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말 그대로 헌팅.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확률을 높여주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 맑은 날씨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는 거지. 오로라를 보려면 제일 먼저 가져야 하는 게 인내심이야. 차분하게 기다려. 나머진 자연의 뜻이야. 네가 간절히 원한다면, 분명 볼 수 있을 거야.”


확신을 얻고 싶었는데. 차분히 기다려보라는 말을 들으니 더 불안했습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하란대로 해야지 뭐. (왠지 더 재촉하면 짜증 낼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함을 열심히 속으로 삼키다 보니 어느새 주위는 어둠과 은은한 달빛으로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눈길을 천천히 달렸는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자 밤 11시가 훌쩍 넘었죠. 차에 내렸더니 은근한 달빛 아래로 넓게 뻗은 숲이 보였습니다. 삐죽하게 솟은 침엽수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고, 나무들 사이사이는 고요함을 넘어 적막함이 느껴졌습니다. 위도가 높아짐에 따라 지평선에 거의 눕다시피 한 오리온자리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극권에서만 볼 수 있다는 왕관자리도 눈에 들어왔고요. 정말이지 아름다운 별이었습니다. 새삼 북극에 와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로라는 이 별보다 아름다울까요?




그곳에서 우리는 숲의 적막을 깨지 않은 채 조용히 오로라를 기다렸습니다.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를 견디며 옆 동행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나 : “춥지 않아?”
R : “무척 추워, 벨라루스는 여기보다 훨씬 따뜻한데. 한국은 어때?”
나 : “음. 날씨를 보니 한국도 여기만큼 춥던데. 왜 그런진 모르겠는데 그렇더라. 그나저나 우리 오늘 오로라 볼 수 있는 걸까? 벌써 2시간이 더 지났는데. 새벽 1시야.”
R : "글쎄. 아까 D가 말했듯이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간절히 원한다면 볼 수 있겠지. 차분히 기다려보자. 행여나 못 보더라도, 여기 위에 맑은 별들을 봤으니 나는 충분해”


그래. 별도 많이 보이니까. 그리고 오로라가 아니더라도 별도 꽤 이뻤습니다. 행여나 오로라는 못 볼 수도 있으니, 별이라도 하나하나 눈에 담아두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습니다. 새벽 1시 30분. 처음에 헌팅 업체에서 약속했던 새벽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까지 오로라를 보지 못한다면, 그 날은 더 기다려봤자 소용이 없을 거라는 D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추위는 발끝부터 시작해 무릎 바로 밑에까지의 감각을 앗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추위에 떨며 20분을 더 기다렸습니다. 숲의 적막을 깬 건 다름 아닌 D였습니다.


D : “오늘은 보기 힘들 것 같다. 더 기다리면 동상에 걸릴 수 있어. 아마 가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더 기다려보고 싶은 사람 있어? 10분은 더 기다려줄 수 있어. 그 이상은 안돼.”
나 : "10분만 더 기다려보자. 내가 이곳 무르만스크에 머무는 날 중 오늘이 가장 날씨가 맑은 날이라고 했거든.”


추위에 떠는 같은 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저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안되더군요. 약속된 새벽 2시가 다되고, 우리는 장비들을 챙기고 차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아쉬운 마음과 내일은 볼 수 있을까? 라는 불안함을 가지고 다시 스타렉스로 향했습니다. 저 뿐만아니라 다들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삐죽삐죽 솟아있는 하얀 나무들 사이로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그때,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연한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산들산들거리기 시작했죠. 오로라인가? 싶은 순간 D가 말했습니다.


D : “다들 저기 봐봐!!! 오로라야. 그래 YEOM. 네가 보고 있는 저 것. 조금만 더 기다려. 지금은 회색이지만, 곧 초록색 선명한 오로라가 보일 거야.”
R : “어디?! 오로라?! 진짜?!!!!!”


오로라! 아 저게 오로라구나!


   아득히 높은 곳. 하지만 별보다는 가깝게 그려지는 초록빛 연기는 점점 더 선명해지더니 이내 무지갯빛으로 바뀌었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내가 여기 있다는 듯. 천천히 눈에 담아도 좋다는 듯 오로라는 느긋하게 일렁였고, 이내 진한 초록빛의 커튼으로 변해갔습니다. 황홀함으로 가득 찬 눈을 간지럽히고 싶은지 커튼의 끝은 바르르 떨렸고, 그렇게 꽤나 긴 시간 동안 우리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다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유럽 여행의 절반 이상을 포기하고 온 러시아였습니다. 갑작스레 끊은 비행기표도 무척 비쌌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의 오로라는 모든 걸 잊을 만큼 좋았습니다. 영하 40도의 한기도 그때의 설렘을 얼리진 못했죠.

언젠가 보겠지 하며 막연히 인생의 끝자락에 넣어 두었던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루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마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버킷리스트를 이룬 순간이었겠죠. 신의 영혼이라고 불리는 오로라를 본 그날 밤. 헌팅에 성공하고 다시 무르만스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는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죽는 그날까지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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