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광섭 Mar 06. 2019

돈은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줄까?

아르헨티나 이과수. 87일 세계일주 #9

목각인형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찌는듯한 텁텁함이 온몸을 덮쳤습니다. 북극권에서 맞이한 그 공기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죠. 이 이과수의 공기가 코에 닿는 순간 금방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와. 그 거대하다는 이과수 폭포를 보기도 전에 내 몸이 땀으로 폭포가 될 것 같은데.


   급하게 공항을 빠져나와 얼른 시내로 가는 벤을 탔습니다. 시내에 내려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짐을 놓고 바로 나왔습니다. 근 12시간 동안 밥을 한 끼도 못 먹었거든요. 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소고기를 주문했습니다. 이곳 아르헨티나는 소고기가 무척 싸서 매끼 먹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맛도 매우 좋고요.


   그렇게 기분 좋게 식사를 하려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제 앉은키와 꼭 같은 키의 꼬마 아이였죠. 제 눈을 쳐다보며 묵묵히 목각인형을 건넸습니다. 서툰 솜씨로 보아서 아이가 직접 깎은 듯싶었습니다. 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여행도 이제 중간을 넘어섰고, 무엇보다 유럽에서 너무 많은 돈을 써서 이런 조악한 걸 사줄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러자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인형을 손에 쥐고 제 앞에 있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 테이블엔 사람도 없는데 왜? 먹다 남은 음식 접시 밖에 없는데 왜 저리로 향할까?


   아이는 주위를 쓱 훑어보더니, 남은 음식 접시에서 고기가 꽤 많이 붙어있던 닭다리를 집어 들었습니다. 다시 저를 쳐다보며 고기를 입에 물었죠. 그러곤 씩 웃어 보이더니 이내 한 손엔 닭다리를, 다른 한 손엔 목각인형을 든 채로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무엇을 보기 위해?

   이과수 폭포의 그 웅장함에 압도당한 것과는 별개로, 그 찌는 듯한 더위와 습기에도 압도당한 저는 출구로 나가는 길 근처 그늘에 놓인 벤치에 앉았습니다. 몇 자리 안 되는 벤치는 저와 같이 더위에 찌든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죠. 그렇게 입장권으로 부채질을 하며 더위를 달래던 제게, 저 앞쪽에서 엉성하게 걸어오는 두 명의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마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가는 길이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 느린 걸음걸이에 제가 다 더워질 때 즈음, 자세히 보니 그분들은 손에 흰 지팡이(White cane)를 들고 계셨습니다. 시각장애인 분들이 길을 안전하게 걷기 위해 사용하는 지팡이였죠.


딱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1.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이곳을 찾았을까. 눈도 보이지 않을 텐데. 다른 감각으로 이과수 폭포의 웅장함을 느끼러 온 걸까?


2. 앞도 보이지 않으니 천천히 걸어야 할 텐데. 아니 좁은 일방통행 길을 걷는데 다른 관광객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정리하려는데 그들이 잠시 멈춰 섰습니다. 아마 제가 앉아있는 그늘에서 쉴 생각이신 것 같았죠. 그런데 어쩌지. 여기 벤치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있는데. 

   그때 옆에 앉아있던 젊은 커플이 일어났습니다. 유창한 스페인어 실력과 생김새로 보아서 이곳 남미에 사는 사람들인 것 같았죠. 그들은 시각장애인 두 분에게 자리를 안내해주며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했습니다. 손가락은 폭포 쪽을 향해있었죠. 조금만 더 걸으면 된다고 얘기해준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들께선 자리에 앉으며 연신 “Gracias”라고 했죠.


   위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호기심은 그대로 둔 채 집에 가야 하는 버스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서 저는 얼른 일어나 출구를 향해 걸었죠. 그 두 분들은 무사히 폭포를 느끼셨는지 지금 생각해보니 조금 궁금하네요.





 제3세계

   분명 저는 제시간에 맞춰 나왔습니다. 아니, 제 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터미널에 도착했죠. 그러나 저는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놓쳤습니다. 앞에 계신 매표소 직원이 바로 제 앞사람과 천천히 대화를 주고받느라 티켓팅이 늦어졌죠. 설상가상으로 버스는 예정보다 10분이나 일찍 출발했고요. 그래서 저는 웃돈을 주고 택시를 타야 했습니다. 스페인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니, 뭐라고 따질 수도 없었죠. 그리고 여기 남미를 여행하는 분들 사이에서 꼭 달고 다니는 말이 있으니.


“This is South America.”


여기는 남미입니다. 급할 것 없어요. 그냥 다 느긋하게 생각하세요.라는 뜻이죠.

사람들이 워낙 느긋하고 게으르다 보니, 다른 곳에서 온 여행자는 아주 화통을 구워삶죠. 그렇다고 따져서 해결되는 일 하나 없으니 그러려니 하라는 뜻에서 나온 말 같습니다.


   그래서 그러려니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엇입니까. 비행기가 무려 10시간이나 연착된 겁니다. 기상이나 천재지변이 아니라 항공사의 문제였죠. 아마 항공사 측에서 오버부킹을 한 것 같았습니다. 직원은 절차에 따라서 보상을 해주겠다고 공손하게 말했죠. 정말 미안하다는 눈치였습니다. 정말로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옆에 계신 한국인 아주머니께서 아주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지금 상황에 대한 건설적인 항의보단 인신공격 위주의 항의를 하셨죠. 영어는 또 어찌나 잘하시던지.


의역하면 이랬습니다.


너희가 이래서 못 사는 거다. 그러니까 제3세계 소리를 듣는 거라고. 이런 일 하나 똑바로 처리를 못하니 아직도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거지. 그러니까 못 벗어나는 거야. 항상 느긋하고 게으르게 사니까. 내가 이래서 제3세계 여행은 안 오려했어. 다시는 오나 봐라. 환불해줘. 다른 비행기 끊어서 갈 거니까. 알았어? 내 말 이해했냐고. 어휴 3세계 애들은 진짜.


   죄 없는 승무원은 거의 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나요. 전산 시스템의 문제 혹은 발권하는 분들의 문제였겠죠. 승무원은 그저 명시된 원칙에 따라 환불 절차를 안내해주었을 뿐인데 왜 저런 말을 들어야 했을지. 분명 그 원칙에 대해서는 아주머니도 항공권을 구매할 때 동의하셨을 겁니다.


    물론 비행기가 연착되어 일정이 틀어진 건 저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분명 저도 “어휴… 남미는 진짜..”라고는 생각했죠.


   그런데 그 아주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제 스스로가 창피했습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창피한 것 말고, 지금 제가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창피했죠.


   이곳은 가난한 나라가 맞습니다. 한때 번영을 누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경제가 반토막이 났죠. 그 목각인형을 팔던 아이에게 제가 너무 무심하게 대했던 건 아닌가 싶었죠. 그 시각장애인들을 바라본 제 시선도 너무 편협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어쩌면 마음의 여유는 돈에서 나온다는 말이 맞기도 합니다. 여행이 중반을 넘어서고 모아둔 돈이 떨어지면서 저도 꽤나 각박하게 행동했거든요. 하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돈이 많지 않아도 충분히 여유롭습니다. 천성이 게으르거나, 느긋하다는 의미의 여유가 아닙니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진심 어린 여유로움이 보입니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그런 소소함에서 풍기는 여유가 느껴지죠.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건 돈이 아닐 겁니다.


그 아주머니. 마음은 부자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Argentina, Iguazu  @kev-hoons






이전 18화 당신은 낯섬에 기대를 가지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