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칼라마. 87일 세계일주 #10
나도 당했구나.
이제 칠레 산티아고를 떠나 볼리비아 우유니로 갈 차례였습니다. 우유니 소금사막은 모든 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인지라, 저도 엄청 기대했습니다. 러시아의 오로라보다, 이집트의 블루홀보다,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보다 멋있을까. 그런 호기심도 들더군요.
산티아고에서 우유니 사막까지 가는 방법은 2가지 밖에 없습니다. 버스를 타거나(가격이 저렴하나 오래 걸림), 비행기를 타거나(가격이 비싸나 금방 감). 금전적인 여유가 있다면 비행기를 타고 편하게 가면 되지만, 저는 가난한 배낭 여행자이기에 숙박비도 아낄 겸(이동시간 30시간) 교통비도 아낄 겸 버스를 선택했습니다.
저렴하게 버스를 타고 가려면 ‘칼라마’라는 지역에서 환승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매우 치안이 안 좋습니다. 강도도 많고, 술 취한 사람도 많이 돌아다니고, 소매치기도 아주 빈번한 가난한 도시이죠. 그래서 저는 버스시간을 최대한 조정해 그곳에 딱 4시간만 있을 예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칼라마’에 내렸습니다. 4시간 뒤에 우유니행 버스가 있으니, 백화점에 입점해있는 카페에 앉아있다가 버스시간 30분 전에 다시 터미널로 돌아왔죠. 17kg나 되는 배낭을 메고 30분을 기다릴 수는 없기에, 옆에 잠시 내려놓고 앉았습니다.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배낭 위에 제 오른손을 얹어놓고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가 가져갈까 봐요.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어떤 아저씨가 다가왔습니다.
저를 보며 10000페소짜리 지폐를 살랑살랑 흔들더니 이렇게 말했죠.
“Exchange? Exchange?”
돈을 바꿔달라는 소리인가?
저는 오른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NO!”
‘무슨 사기를 또 치려고.. 내가 여행을 얼마나 다녔는데 그런 수작에 넘어갈까 봐?’라고 생각하며 그 아저씨를 무시하고 제 손목 시계를 쳐다봤습니다.
버스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걸 확인하곤 고개를 다시 들었죠. 그런데 이번엔 저쪽에서 백인 커플이 저에게 다가오더군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요. 이건 또 무슨 사기를 치려나 싶어 긴장하고 있는데 백인 여자가 말을 건넸습니다.
“They took your backpack. Oh my god”
?? 그게 무슨 말이야. 내 가방 옆에 있는데
??
없어?
17kg짜리 가방이 없어?
그 무거운 가방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머리는 하얘졌지만 얼른 정신을 차리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저기 먼 곳에서 남자 두 명이 제 배낭을 가지고 골목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 아저씨가 돈을 흔들며 제 시선을 끈 사이, 그 아주 잠깐 사이에 다른 남자가 제 가방을 가져간 듯싶었습니다. 숨을 고르고 그 2인조를 따라 뛰어갔습니다. 그들은 낡은 시멘트 담과 흙길로 싸여있는 골목길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들어가려는 순간, 누가 제 손목을 잡았습니다. 40대 정도로 돼 보이는 라틴계 여자였습니다.
“Nono. You die.”
에이. 도둑이랑 한패 인가 싶어 무시하고 따라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온 힘을 다해 제 손목을 잡더니, 심각한 표정과 함께 다른 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걸 보니 한패든 아니든 이건 정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잠시 멈추고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그러곤 이내 발걸음을 돌렸죠.
뒤돌아 나가는데,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일단 침착하게 경찰서에 갔습니다. 제 처절함을 알리기 위해 번역기를 켜고 배낭을 도난당했다는 말을 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제 표정을 보고 이미 눈치를 챘는지 아주 익숙하게 이쪽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담당 형사는 다른 영어는 전혀 못해도 이 말은 할 줄 알더 군요.
“We can't find him. Give up.”
그래. 못 찾겠지. 나만 이렇게 도난당한 게 아니겠지. 그러니까 유일하게 아는 영어가 “넌 못 찾아” 일 테고요.
열심히 번역기 돌려가며 작성한 도난신고서를 받아 들고 다시 거리로 나왔습니다.
우유니로 가는 버스는 이미 떠난 지 오래였습니다. 하루에 한 대밖에 없는 버스니 이 무서운 칼라마에서 내일까지 있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집 나간 제정신을 다시 가져와야 할 것 같아 근처 호텔을 예약했습니다.
호텔 침대에 앉아, 제가 가진 모든 것들을 꺼내봤습니다.
여권, 휴대폰, 지갑, 충전기, 노트북,
그 당시 입고 있던 옷(수영복 바지, 긴팔 셔츠, 바람막이, 여름용 가죽 샌들)
그리고 (배낭이 있다는 가정하에) 남은 일정을 딱 맞춰 소화할 수 있는 돈.
혹은 딱 한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권을 결제할 수 있는 돈.
정말 머리가 하얬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화가 났습니다.
나는 왜 그렇게 침착하지 못했지?
왜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지?
그 무거운 걸 들고 가는데 몰랐다고?
그 찰나에 잠깐 고개만 돌려도 알 수 있었을 텐데. 왜 방심한 거지?
그래 놓고 무슨 세계일주를 해?
그 상황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배낭을 그냥 매고 있었을 텐데. 아니면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샀던 케이블로 몸과 배낭을 엮어놨을 텐데. 아니면 그냥 그 골목으로 따라 들어갔을 텐데.
일단 모든 옷을 도난당했으니 집에 가야 하는 건 맞는데.
뭔가 억울했습니다. 뭔가 애매하게 억울했습니다.
귀중품은 다 저에게 있었습니다. 애매하게 다 저에게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건지, 여행을 계속하라는 뜻인 건지 다 저에게 있었죠.
그래서 저는 처절하지만 담담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선택권이 뭔지 알아야 했거든요.
그러곤 이내 휴대폰을 들고 KT 유심으로 바꿔 꼈습니다.(다행히 한국 유심이 저한테 있었습니다.) 그러곤 보험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제 사정을 말하니, 바로 처리를 해주겠다 했습니다.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죠. 그리고 해가 뜰 무렵, 보험사에게 메일이 왔습니다. 피해 부분에 대한 환급이 완료되었으니 계좌를 확인해달라고요.
결과적으로 불과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지만, 저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유니 사막도 보고, 마추픽추도 보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자유의 여신상도 볼 수 있게 되었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었습니다. 이제 이 돈으로 배낭도 사고, 간단하게 옷도 사면 되니까. 새로 산 배낭은 들은 게 없어 훨씬 가벼울 테니, 마추픽추 올라가는데 한결 쉬울 것 같습니다. 세수는 폼클렌징 말고 비누로 하면 됩니다. 렌즈는 없으니 안경을 끼고 다니면 됩니다.
저는 아직 봐야 할 자연과, 별이 많이 남아있었죠. 집에 안 가기로 했습니다.
PS) 2인조 도둑에게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도망가느라 고생했어.
하지만 그렇게 돈이 되는 물건은 없지.
기껏해야 옷가지랑 상비약들이잖아.
너희가 나 대신 말라리아약을 먹겠니, 고산병 약을 먹겠니.
아. 그래도 거기 있는 옷들은 내가 여행 오기 전에 전부 새로 산 옷들이야.
특별히 다채로운 색으로 샀어.
얼핏 보니 나랑 사이즈도 맞을 것 같은데. 잘 입고 다니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