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나'밖에 없었던,
나르시시스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가 어떤 이유에서건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아이는 티가 난다.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하지만 살다 보면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꼭 한 명은 필요해서. 그렇게 시작된다. '나 자신'이 끔찍하게 애틋하고 소중한, 그런 '나'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는 사랑.
'나' 말고는 도저히 제대로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 평생 남에게 받아볼까 말까 한 사랑을 받게 되어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정도는 '내'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사랑에 못 미친다며 불평한다. 그게 얼마나 폭력적인 태도인지도 모른 채.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들이 '나'를 아끼는 상대방에게 얼마만큼의 상처를 줄지 알지 못한 채.
고여 있는 물은 혼자서 깨끗한 물이 될 수 없다. 정화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물을 부어줘야만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물도 언젠가는 고인 물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에겐 끊임없이 새로운 물이 필요하다. 내'가 얼마나 잘못된 생각으로 '나 자신' 또는 남을 괴롭히고 있는지 말해야 하고, 들어야 한다.
오롯이 혼자인 세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나'는 '내'가 만들어낸 '나'의 광활한 우주 속에 갇히기 때문이다. 분명 첫 시작은 그저 외로웠고, 그렇게 아무도 '내'얘기를 들어주지 않았고, '나'를 알아주지 않았고, 무언가 결핍된 '나'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의 우주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나'는 더욱더 남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된다. 그러다 보면 '나'는 '내'가 만든 광활한 우주 속 미아가 된다. 분명 '내'가 애초에 원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은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고장 난 부분들을 남들과 공유해야 한다. 때로는 어떤 모진 말들을 들어야 하고, 속이 무너져야 하고, 그렇게 해서 애틋하고 안타까운 '나'를 잃어버려야 한다.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그러다 보면 '나'와도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고, 남과도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긴다. 그리고 알게 된다. '내'가 외로웠던 건 적절한 거리라는 게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건지 몰라서였기 때문이었다고. '나'에게는 늘 적절한 것보다 더하거나 덜한 게 필요했던 상태였고, 그게 '나'와 남을 괴롭혔다고.
우리는 보기보다 훨씬 더 나약해서 방패 뒤에 꽁꽁 숨거나 창으로 열심히 상대를 찔러대기 바쁘지만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실은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지 말이다. 이 모든 건 실은 나의 이야기이면서 또 나와 같고도 다른 '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좀 더 정신 차리고 힘내보자고.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받을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