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전날 밤에 꾼 꿈이 유난히 생생하고, 문 밖에 거리를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유난히 행복해 보이고, 거울 속 내가 유난히 작고 초라해 보이고, 그렇게 유난히도 외로웠던 날에이 감정을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을 때. 마음의 발걸음이 문득 등 뒤로 달려갈 때.
지금보다 어릴 때는 그럴 때마다 뒤로 냅다 뛰어가도록 스스로를 내버려두었다. 헤어진 연인이 생각날 때마다 카톡하고 전화하며 후회할 일을 반복했다. 마음 한 켠에서 후회할 짓을 안 하면 더 후회할 거라고 스스로를북돋았다. 그러나 그러한 어리석은 짓은 내게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생채기를 남겼고,엉망이 된 나를 수습하는 데에 오래 걸렸다. 어쩌면 아직도 일정 수습 진행중인 걸지도 모르겠다.
바로 얼마전 일이었다. 문득 또 헤어진 연인이 무척이나 그리웠고그 마음은 날 텅 비게 만들었다. 그렇게 외로운 마음에 퇴근 후 마트에 들러 할인하는 와인을 사 왔고 반 병을 후루룩 마셨다. 빠르게 마신 탓에 속이 울렁거렸고 그렇게 시작해서 모든 게 울렁거렸다. 그가 그리운 것도이러고 있는 스스로가 추하게 느껴지는 것도 전부 다 울렁거렸다. 전화번호를 몇 번이고 눌렀다 지우고 눌렀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망설이는 일은 분명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백번 하면서도 통화버튼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이놈의 번호는 왜 이렇게 쉬운 거냐며. 언제나처럼 투덜거리며.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다. 난 어른인데 어떻게 하면 좋지. 추하지 않게 그리워하는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그에게 전화하고 싶은 이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팩트는 나는 아직 헤어진 연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고, 헤어진 연인은 더 이상 나에게 듣고 싶은 말이 없다는 것. 나는 어떻게든 이걸 혼자 해소하고 잘 살아가야 한다는 것.
고민하다가 녹음 어플을 켰다.
그 사람이 듣고 있다고 가정하고 혼자 몇 분을 떠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걸 들어봤다. 사실 녹음하면서 떠들기만 하진 않았고그 끝에 결국 울기까지 했다. 두 귀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나의 찌질함에들으면서 한 번 더 눈물이 났다.녹음하고 이걸 듣기 전에는 그 사람에게 보내고 싶은마음도 조금 있었는데듣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그런 마음이 싹 가셨다. '내가 하는 말들이, 이런 내 마음이 참으로 온전히 나만의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나만의 온도였다. 그 사람이 나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절대 닿지 못할 나만의 진심.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이렇게 혼자 녹음해서 들어보는 것도 꽤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간직하지 않고 그때그때 버리고,마음이 좀 답답해지면 다시 녹음해서 들어보고, 또 버리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맨 처음에 녹음한 것 빼고 그 이후에 4번정도 더 녹음을 했는데,전부 그 다음 날 또는 그 당일에 지웠다. 맨 처음 녹음했던 거는 뭔가 신기해서 내버려두고 있다.내 속에 이런 게 있구나싶어서. 나라도 그런 스스로를 이해해 주고 그 지리멸렬한 마음을 받아주고 싶어서. 내 안을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데에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털어놓는 얘기만큼 진심인 게 또 있을까. 직접 나처럼 해 보면 '내 마음속에 이런 게 있었구나.나는 이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구나.'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오랜 시간 방치된 감정은 알아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때로는 감당이 안 될 만큼 커지기 마련이다.왜냐하면 우리 삶에 한 번이라도 들어온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그저 내 삶 속에서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하며 나와 계속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인간이 나약하고그래서 가여운 법인데. 어쩌면우리는 한없이 찌질해지고 싶은 나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다. 후회는 할수록 늘고, 나쁜 것도 할수록 늘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이란 건 현재보다 흐리고,흐린 모든 것은 달콤하다. 고통스러웠던 시간마저도 사실은 행복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러나 두 눈 똑바로 뜨고 지난 시간을 마주해 보면상대만큼이나 사실 나도 힘들었고,내가 부족했던 것만큼 상대도 부족했다. 그러니 가끔은 이렇게라도 내 얘기를 스스로 들어주자. 상대는 절대 날 가여워해 주지 않을 테니나라도 나를 가여워해 주고 토닥여줘야 한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서 오늘과 내일을 살고, 약해지면 또다시 돌아와서 털어놓고 말이다.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내 마음을 잘 알아주지도 잘 들어주지도 않는다. 물론 모든 얘기를 다 안 들어준다는 건 아니지만. 그저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감정쓰레기통이 필요한 거라고. 그리고 그 존재는 생각보다 매우 중요한 거라고. 코 푸는 곳이 있어야 밖에 나가서 덜 훌쩍거리지 않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