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는데, 내가 지금껏 했던 일 중에 나랑 제일 잘 맞다. 계속 몸을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서 잡생각이 덜 들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정리정돈해야 하는 일이 적성에 맞고 꽤 재밌기까지 하다. 그리고 신체의 활성화가 뇌의 활성화로 이어지는 건지 일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이런 나의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해 주는 상사 덕분에 내 아이디어를 직접 실현시킬 수 있는 게 무척 신이 난다.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점심과 커피도 제공해 주고, 집과도 가깝다. 그렇다면 나는 뭐가 문제여서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그렇다. 그만두면 멍청이가 따로 없는 이 천국의 일터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멍청이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원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올해 들어서야 비로소 명료해진 사실이 하나 있다. '나를 망치는 건 늘 나'라는 것. 만성적인 자기혐오는 내가 행복할 수 있을 때 행복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를 불행하게 할 새로운 고민거리를 만들거나, 내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서게 만든다. 행복하거나 행복할 수 있는 나를, 그것의 지속성과 가능성을 파괴하고 내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정말 포기해 버리면, '거봐, 넌 불행한 게 어울린다니까.' 라며 나를 조소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함정의 도입부에 또 빠르게 다다른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작년부터 시작해서 올해 초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을 손절했다. 번호를 바꾸면서 1차례, 연기수강을 그만두면서 2차례, 연인과 헤어지면서 3차례, 독서모임을 그만두면서 4차례, 몇 년 만에 연락온 고등학교 동창 친구의 연락을 받지 않으면서 5차례. 이런 단계를 거쳐서 지금 내가 가족 이외에 연락하는 친구는 단 한 명뿐이다. 나를 이렇게 외롭게 만든 건 난데, 내가 자초한 외로움은 더 견딜 수 없어서, 매일 같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안 사도 되는 것들을 산다. 요즘 나 자신을 떠올리면 '폐허', '사막', '지옥' 이런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피폐하며 비정상적이다.
일을 할 때 좋은 점은 나의 정상적인 면모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무리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것들이 있고, 그게 남들의 눈에 보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 문밖에서의 내 삶을 잘 아는 내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정상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게 문제다. 겉으로만 정상인 척이 아니라, 정말로 내 정신과 신체가 건강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 갭은 정상인 척으로 메꾸는 건 어림도 없을 정도로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이런 나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나는, 특히 더 견딜 수 없을 때마다 마라탕을 시켜 먹으며 애꿎은 위장만 조지고 있는데. 이제는 마라탕으로도 이 복잡한 하루가 안 삼켜진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고통스러운 건 도대체 뭘까. 정말 수치스럽지만 솔직히 말해보겠다. 나에게는 없는, 이상적인 직업과 가정 그리고 올곧은 성격의 삼박자를 다 가지고 있는 상사의 존재.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나의 인간관계나 연애가 그동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한데) 사소한 꾸중이나 비난도 참지 못하는 나. 이렇게가 두 가지가 큰 줄기이다. 그리고 이 두 줄기는 하나의 뿌리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바로 나의 열등감이다.
나도 안다. 내가 이렇게 스스로에게도 외면받는 수치스러운 고통을 느끼는 건, 가진 게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자존감이 낮은 이유는 내가 가진 장점을 제대로 못 보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좋은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바로 어제 아침을 먹으면서 엄마한테 얘기했었다.
"엄마, 장애형제를 가진 형제들은 다 착하지?"
"그건 갑자기 왜?"
"아니 그냥 그럴 거 같아서. 근데 난 아니잖아."
"아니지. 오히려 장애형제를 가진 애들은 보통 어릴 때 장애형제에게 관심이 쏠려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으니까.. 그리고 여러 일들을 겪으니 더 예민하고 힘들지."
"OO오빠 누나는 성격이 어때?"
"잘 몰라. 근데 그 가족이 다 힘들어했고, 힘들지. ㅁㅁ(나의 오빠)보다 장애정도가 더 심하니까."
어릴 때부터 읽었던 온갖 심리학 서적에 따르면, 나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 애착형성이 잘 되지 않았고, 아빠와의 낮은 유대관계가 불안정한 인간관계로 이어지며, 낮은 자존감과 높은 방어기제로 외부의 반응을 (실제로는 부정적인 반응이 아닐지라도) 공격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 나랑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어도 더 긍정적이고 더 나은 사람이 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나도 내가 느끼는 발목에 넘어지더라도 무너지지는 않으려고 수없이 노력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또다시 실패다.
나에게는 없는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상사가 너무 부럽고, 그분께 극심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느낀다. 모든 게 어설픈 나는 이럴 때 뭐 하나만 하지 않는다. 이런 내 감정에 대한 죄책감도 느낀다. 또한 절망감도 느낀다. 앞으로도 내 인생에 그 세 개가 평생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세 개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이런 마음의 그림자로부터 또 도망가고 싶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도 있는, 편안하고 행복할 수도 있는 나'의 앞날을 또 방해한다.
내 곁에 '좋은 사람'이 없었던(또는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닌 것뿐만 아니라, 좋은 사람을 견디지 못했던 거구나라는 내적 결론을 얻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열등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눈에 띄는 성격적 흠 또는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진 사람이나 나와 비슷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던 것이다. 그래야 내가 위로해 줄 수 있고, 내가 위로받을 수 있고, 그러면 나의 부족한 점이 감춰질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서로 입을 벌리고 있는 관계들뿐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나도 궁금하다. 과연 내가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아니 사실 궁금한 게 아니라 무섭고 두렵다. 내가 또 나를 견디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면 어떻게 하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도대체 이놈의 나라는 인간을 어떻게 하면 그의 인생의 방향을 틀어 더 행복하고 편안하게 만들지. 어떻게 하면, 담배가 아닌, 술이 아닌, 소비가 아닌 것으로 내 마음을 채울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단단한 척이 아니라 정말 단단해지지. 모르겠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