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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Jul 19. 2023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아니, 쓰는 이유?

그 정적 속에는 모든 의무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내가 지닌 모든 가치관의 하락이 담겨 있었습니다. 질서에 대한 열렬한 믿음, 선한 동기나 결과, 추측과 예언에 대한 경시, 장인 정신이 어느 세계에서나 존재하리라는 느낌, 그런 생각들이 하나씩 사라졌습니다. 막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하고 유연한 매개체라 확신했던 소설이 기계적인 집단 예술에 복속되어가는 것을 보았지요.

<무너져 내리다> 스콧 피츠제럴드



정독과 음독을 번갈아 하고 있는 책이 있다. 한 권의 책을 이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평소 속독을 즐겨하는 편은 아니지만 한 권의 책을 부러 천천히 읽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29일 동안 천천히 음미하며 인상 깊은 구절을 올리고자 마음먹은 '그믐' 덕분이다.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기는 하나 이 책에 담겨있는 여섯 편의 단편이 작가의 또 다른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공은 다 달랐지만 이야기가 하나로 관통하고 있는 느낌도 들고 말이다. 지난달에 신형철 평론가의 고전수업을 듣고 이 책을 읽어야겠다 마음먹었는데, 역시나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여러 작품 중 유명하지 않은 단편들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상상력에 매료되기도 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신형철 평론가는 그 수업에서 "위대한 문학작품은 왜 위대한가"를 우리에게 질문했다. 소설을 읽는 이유, 소설을 쓰는 이유와도 맞닿아있는 질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 또한 소설이기에 그의 답이 궁금했다. 그가 말하길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게조차 진실하지 않다고 한다. 에세이가 진솔한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어쩌면 인식을 적재한 문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소설에서만큼은 마음껏 이야기를 비틀어도 된다. 얼토당토않은 상상력을 덧붙여도, 소설이니까 괜찮고, 소설이니까 비난받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들이야말로 작가의 가장 솔직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차마 전하지 못한 자신의 깊은(부끄러운) 속마음을 주인공이라는 방패로 돌려 말하고 있는 걸지도. 그래서 신형철 평론가는 소설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표현되는 데 성공하는 걸 지켜보는 기쁨이 있다고 말했다. 예술은 경험에 대한 이해(경험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를 높여주는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 능력을 지니는 한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그 이유 때문에 더 높이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인식(인간의 내면)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 문장이 곳곳에 담겨있는 것이 소설이다. 그걸 찾고 희열을 느끼는 건 독자의 몫일 테지만 말이다.


그날의 강의를 듣고 나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나의 헛된 꿈을 더욱 키워갈 수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가장 솔직한 글을 쓸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다. 주인공의 몸을 빌려 내가 하고 싶은, 조금 거칠고 어두운 이야기를 마음껏 써 내려갈 수 있을 것만 같으니 말이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조금씩 글로 써 내려가고 있다. 과연 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전해도 될까. 고민은 깊어지지만 속은 후련하다. 미완성이 완성이 될 때까지 일단은 끄적여본다. 다만 요즘은 그 소설을 조금 놓고 있다. 어두운 소설을 쓰고 있는데, 내 삶의 조명이 너무 밝아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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