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은희야.
영화나 드라마, 소설은 우리가 성장하며 지나쳤던 그 시절의 감정과 생각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과 사건을 보며 그때 나에게 벌어졌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들을 다시 한번 반추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던 영화는 <벌새>였다. 김보라 감독의 첫 장편 작인 벌새는 1994년,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은희의 보편적인 삶을 이야기로 담고 있다.
김보라 감독은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많은 인터뷰를 통해 밝혀왔다. 영화 <벌새>가 눈부시게 도약하는 지점은 이 사적인 경험담이 공적 영역으로 침투할 때 발생한다고 말이다.
은희의 가족은 대체로 평범하다. 그 평범의 범위라는 것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 보통 가족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일상에 무기력한 어머니, 아빠를 닮아가는 폭력적인 오빠와 방황하는 언니, 그리고 막내 은희. 이렇게 5명의 가족이 집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느리고, 단조롭다. 가끔 주인공들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물음표가 생기기도 한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느꼈던 감정은 답답함이었다. 특히 은희의 모습이 말이다. 막내에게 쏟아지는 가족들의 존중 없는 행동들을 전적으로 수용만 하다가 지쳐버린 은희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면서 목에 무언가가 턱 하고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아니, 어쩌면 그건 무기력이 아니라 침묵하기로 결심한 걸지도 모르겠다.
다 알고 있지만 그냥 모른척하자
영화가 끝난 후에야 알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물 없이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는 것처럼 답답함이 올라왔던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 속 은희의 모습이 어릴 때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부당한 일에도 싫다는 표현조차 망설이고,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나의 목소리조차 감히 낼 수 없었던 그때의 어린 나. 나의 존재를 자신들과 동일시하며 불행한 감정마저 같이 짊어지길 바라고 전가했던 부모님들의 행동과 그저 묵묵히 그 감정들을 흡수해버렸던 그때의 나.
어린 나는 그 모든 상황들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그저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남들도 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침묵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어떻게 질문하고, 나의 생각을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다. 배운 적도 없고, 배워야 하는 것을 가르쳐준 이도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은희에게 가졌던 답답한 마음이 실은 어릴 때 나의 모습을 동일시했던 것임을 뒤늦게 깨닫고 나니 마음이 아프면서도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은희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지금의 내가 은희와 같은 어린 소녀를 만난다면 꼭 안아주면서 말해주고 싶다.
너는 너의 삶을 살아가라고.
너의 삶은 너만의 것이라고.
어느 누구도 너의 삶에 대해 함부로 침범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맞서 싸우라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 자신 스스로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