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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Apr 22. 2020

지난겨울, 낯선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낯선 전화를 받았을 때는 1월의 어느 날이었다.


낮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날따라 진동 모드가 풀려버렸는지 소리가 엄청 컸다.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나는 모르는 번호는 아예 안 받는다.(몇 번 보이스 피싱 전화를 받은 후에는 더 그렇다) 꼭 필요한 용건이 있다면 문자를 하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비몽사몽 간이라서 나도 모르게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누군가가

"작가님~"

그랬다.

정체불명의 남자 목소리였다.


일상 통화에서 나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줌마 또는 고객님이라는 호칭이 익숙한 나에게 작가님이라니... 그래서 머리를 막 굴려 보았다.

'어느 출판사에서 전화가 온 건가??? 글도 안 썼는데 세상에나 어떻게 알고 전화를 다 주지????'  

잠깐 사이 그런  야무진 생각을 했다.


"작가님~ 저 OOO이에요."

상대방이 또 얘기를 했다.


OOO이 누구인지 귀가 어두워서 잘 알아듣지 못했다.


"잉? 누구시라고요?"

"작가님, 저요. 찬준이요. 찬준이. 오. 찬. 준"

.

.

.

"어머머... 준아~ "

그제야 생각이 났다.


오찬준은 나랑 같이 독서모임에 나오는 줄리썸머님의 아들이다.


올해 10세가 된 찬준이는 엄마 따라 새벽에 일어나서 토요일 오전 7시부터 독서모임에 나온다. 9세인 작년에도 부지런히 나왔다. 어른들이 토론할 때 과일 접시를 테이블마다 배달해 주고 다른 집 동생들도 잘 데리고 노는 의젓한 어린이다. 내 눈에는 20세 보다 더 철든 10세 아동이다.^^


찬준이가 엄마 휴대폰에서 '리하작가님'이라고 쓰여있는 전화번호를 자기 휴대폰에 저장을 했단다. 추운 겨울 피아노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한테 전화를 다는 거다.


너무 반가웠다. 잠이 확 깼다. 준이가 나한테 전화를 걸어 준 것도 신기했고, 추운 날씨.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내가 생각났다는 사실도 좋았다.


우리 둘은 꽤 오래 통화를 했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시시콜콜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휴대폰을 쥐고 있을 준이의 손이 생각났다.


"준아. 근데 너 장갑은 꼈어?"

"아뇨,"

"뭐? 맨손이라고? 어머머...얼마나 손 시렸을까."

"안 시려요. 작가님."

"아냐. 안돼. 감기 걸리니까 전화 끊고 얼른 집에 가."

"네."

"주머니에 손 넣고 조심해서 가야 돼."

"네, 작가님. 안녕히 계세요."


그날 이후 준이는 '줄리썸머님 아들' 겸 '내 친구 준이'가 되었다.


준이가 심심할 때 생각나서 전화하는 상대가 '나' 라면... 나는 준이의 친구가 맞는 거 아닐까? 심심할 때 일부러 부담스럽고 어려운 이한테 전화 거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준이는 심심한 순간, 나이 든 내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요새 아주 복에 겨워서 10세 친구인 준이를 사귀고, 16세 친구인 인서(꿈트리님 딸)를 사귄다. 나는 아무리 봐도 연로한 분들보다 어린 사람하고 더 잘 맞는 것 같다. 말도 다 통하고 애들도 나를 편하게 대한다. 내가 철딱서니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어릴 때 인형처럼 예뻤다. (나는 귀여운 아기 사진과 동물 사진을 좋아한다. 준이 엄마의 인스타그램에서 너무 예쁜 준이 모습을 다 다운로드했다.^^)


아기 준이


얼마 전에는 이 사랑스러운 꼬마이자 내 친구  준이가 나한테 요런 쪽지도 보내 주었다.  포스트잇에 꼭꼭 눌러써준 손 편지다. 너무 귀엽다.^^



독서모임에 새벽부터 나오는 준이가 너무 예뻐서 집에 있는 내 책과 다른 작가님들의 동화책들을 들고 가서 줄 때가 있었다. 책 좋아하는 준이라서 잘 읽었나 보다. 읽고 나서 이렇게 쪽지를 보내주니 내가 오히려 고맙다.


준이 엄마, 줄리 썸머님은 영어 교육, 하브루타, 독서, 그림, 글씨, 뜨개질, 요리에 착한 마음씨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요런 깜찍한 아들을 낳은 것 같다


줄리와 썸머, 두 사람이 보내준 편지와 선물.


긴 편지와 함께 아기자기 선물까지 보내 준 두 사람. 이 두 사람은 정말 못 말리는 사랑꾼들이다.  


엄마랑 친구가 되면 아이와도 친구가 되는 신기한 경험.


준이와 나는 (주변의 숱한 반대와 우려 속에서도^^) 무려 40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준이는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누가 묻지도 않고,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자기랑 친한 동화작가가 있다고 밝히며 다닌다고 한다.

뜨끔했다. 엄청 당황스럽기도 했고.

'나, 요새 동화 안 쓰고 노는 중인데...어쩌나.'


"야, 네 친구가 동화작가라면서 도대체 무슨 동화를 썼는데?"

준이 친구가 그렇게 물고 늘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가장 어린 친구, 준이의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도록. 이쯤에서는 나도 정신을 차리고 동화를 다시 써봐야겠다.


몇 년째 글 쓰기가 싫고 귀찮고 지겨웠었다. 그 크기만큼 사는 것도 우울했고 나 자신이 싫어지는 날도 부지기수로 많았다. 그러나 이제 내 머릿속에 가득 쌓여있던 먼지들을 털어내며 끄적끄적 글을 써보려 한다.


아기때  준이


인형처럼 귀엽던 아기 준이도 의젓하게 자라나서 형아처럼 행동을 한다. 나도 준이처럼 의젓하고 싶다.


세월의 흐름에 맞춰 살다 보면 절대 못할 것 같던 일도 하게 되고, 다시는 볼일 없을 것 같던 사람과도 만나게 되곤 한다. '못해, 안 해, 필요 없어.' 내 앞에 높디높은 선을 그어 놓고 뒤로 물러 앉아 팔짱만 끼고 구경하는 삶은 이젠 그만 하고 싶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전화하는 준이처럼.

"작가님, 보고 싶어서 그냥 전화했어요."

그렇게 솔직한 준이처럼.

나도 내 감정에 보다 솔직하게 반응하며 살고 싶다.


엊그제는 준이의 10세 생일이었다. 내 친구 준이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준이가 밝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자라주길 바란다.

나 또한 내 친구 준이가 읽을, 재미와 의미를 다 갖춘 동화를 썼으면 좋겠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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