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상 서랍에서 뭘 좀 찾으려는데 잘 열리지 않더군요. 가까스로 열어보니 오래전부터 쓰던 일기장과 편지지, 스티커 등이 한데 엉켜 덩어리로 있더라고요.
꺼내서 일일이 늘어놓아 보았습니다. 2011년 선물 받은 수첩이 시작이었어요. 먼슬리 다이어리. 달력의 빈칸을 조금 키워놓은 것이 바로 월간 스케줄표인데. 그 칸에 일기를 쓰면 바로 월간 달력이 되는 거죠. 쓰다 보니 편리하고, 분량의 부담도 없어서 매년 하나씩 사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올해로 10년 차에 접어들었네요.
잊었던 순간들이 생기면 저 일기장들을 펼쳐서 그 해, 그날을 찾아봅니다. 다행히 그날의 기록이 있으면 기억은 자연스럽게 떠올라요. 그러나 그날의 기록이 빈칸으로 남겨져 있으면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죠.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백지인 그날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냥 사라져 버린 날처럼 여겨질 때도 있어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죠. '아, 그날도 나는 밥 먹고 잘 자고 잘 살았나 보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그날. 저는 몹시 아팠을지도 모릅니다. 힘들거나 괴로웠을지도 모르고, 슬퍼서 많이 울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반대로 즐겁고 행복하고 기뻤을 수도 있어요. 그 다양한 감정의 순간들이 있었음을 영원히 되새기지 못하고 지나가게 됩니다.
기록해놓지 않은 오래전 일들을 떠올리기는 어려워요. 물론 오래전 일을 기록해 놓았다고 해도 기억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땐 기록에 의지하면 되지 않을까요? 제대로 기록했겠지 하고 과거의 나를 믿으며 지난 세월을 상상해 보는 겁니다.
예전에는 이 빠진 것처럼 빈칸을 듬성듬성 내놓기도 했는데요. 요즘은 정성을 기울이는 편입니다. 매일매일 제게 주어지는 '하루의 빈칸'을 채우려고 몇 줄이라도 일기를 씁니다.
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듯 일기장 속 그 날짜의 여백을 저의 손글씨로 채워 봅니다. 10줄 내외의 자잘한 글씨로 하루를 색칠하는 거예요. 그날의 사건(?)과 그날의 제 느낌이 가장 중요한 쓸거리가 되어 주죠. 올해 상반기까지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았네요.
제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는데요. 당시 유일한 숙제였던 것 같아요. 저는 나름 모범적이고자 애썼던 학생이어서 숙제는 꼬박꼬박 했습니다. 애석하게도 2학년 일기장은 없고요. 3학년 때 일기장부터 6학년까지 일기장이 있더군요.
아래는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79년의 일기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의 일입니다. 일기장도 늙었습니다.
1979년 4월 25일 수요일
제목 : 지우개를 자르고
오늘 아침에 지우개를 잘랐다.
공부를 하는데 틀려 지우는데 자꾸 뿌러졌다.
그래서 잘를때는 가슴이 아프지 않았는데
잘르고 나서 생각을 달리 했다.
지우개가 사람이고 사람이 지우개면
지우개가 날 잘랐을 거란 생각을 했다.
나는 다음부터 지우개를 자르지 않게다고
굳게 굳게 다짐하고 맹세했다.
어렸을 때 제가 일기를 쓰면 엄마가 늘 검사를 해주셨거든요. 그런데 이 날은 엄마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 일기를 살펴보지 않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맞춤법이 많이 틀려 있으니까요.
부러졌다 - 뿌러졌다.
자를때는 - 잘를때는
않겠다고 - 않게다고
40년 전 어느 날 지우개를 자르고 마음 아파했던 열 살 꼬마의 심정이 녹아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고요. 엄마가 분명 바쁘거나 편찮으셨을 거라는 것도 알 수 있죠. 그때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일기를 보니 그때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일들이 있는데요.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 길거리에서 제 발 끝에 차이는 돌멩이나 빵 봉지를 집으로 가지고 왔어요. 쓰레기를 날마다 끌고 집으로 온 거예요. 그럴 때마다 엄마가 뭐라고 하셨죠. 그럼 저는 따박따박 말대답을 했었어요.
"내 발에 닿고 내가 손으로 만진 걸 어떻게 대문 밖에 두고 와?"
엄마는 기막혀했지만 강제로 내다 버리신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책상 서랍은 언제나 쓰레기통이었어요.
아래는 저의 초등학생 때부터의 일기장들이에요. 버렸을 줄 알았는 데 있더라고요. 낡고 빛바랜 추억의 일기장들입니다.
이 일기장들 말고도 그 이후에 저는 다양한 형태의 일기장들을 두루 섭렵합니다. 노트에서부터 손바닥만 한 수첩 일기장, 자물쇠가 달린 것에서부터 리본이 달린 것, 10년짜리 '육심원 다이어리'에 이르기까지.... 일기장이란 일기장은 다 써봤나 봐요.
결혼 후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다 보니 보관하는 것도 분실된 것도 있는데... 일기를 늘 쓰려고 했던 마음만큼은 간직하고 있습니다.
일기에 관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안네의 일기'죠. 유대인 소녀였던 안네 프랑크는 나치의 눈을 피해 2년여에 걸쳐 숨어 사는데요. 열세 살의 나이에 선물 받은 일기장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써 내려갔습니다.
안네는 자신의 일기장을 '키티'라고 부르며 소중히 여겼어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말하지 않았던 내밀한 속마음을 일기장에 털어놓습니다. 일기장 '키티'가 전적으로 자신을 지지해주고 위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2년간에 걸쳐 일기를 쓴 안네는 결국 붙잡히고 수용소에서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그녀가 죽은 후 유일한 생존자였던 아버지에 의해 안네의 일기가 출간되는데요. 혹자는 아버지에 의해 약간의 첨삭이 있었을 거라고도 말해요.
가족 간의 문제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 원망 등이 13세 어린 소녀의 일기장에는 가감 없이 그대로 있었을 테니까요. 아버지 입장에서는 딸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사실 앞에 주저하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안네의 일기>는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문학의 백미로 손꼽히며 문학사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상의 불합리와 모순,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아름답고 수려한 문장으로 깊이 있게 표현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오래도록 간직되고 기억되어야 할 작품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자신의 생각과 하루의 일들을 돌아보며 어떤 일들이 옳았고 나빴는지 반성한다면 정말 고귀한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할 때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될 텐데. 물론 매 순간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야. 크게 힘이 드는 것도 아니고 아주 도움이 될 거야.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경험을 통해 깨달아야 해. 조용한 양심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걸.
<안네의 일기> 336쪽
안네는 이렇게 말했어요. "종이는 사람보다 인내심이 강하다"라고. 종이는 잘 참고, 잘 견디고 끝끝내 버텨줍니다.
기록하지 않은 기억은 기억되지 않아요. 안네가 종이에 눌러쓰는 펜의 힘을 믿고 일기를 쓴 것처럼 우리의 아이들도 어렸을 때부터 몇 줄 일기라도 써보면 좋지 않을까요?
글쓰기 실력을 키우고, 사고력이나 집중력을 키울 수 있고 등등의 효과는 생각하지 말기로 해요. 일기는 무언가를 잘하기 위해서 거쳐가는 중간과정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쓰다 말다 해도 괜찮고요. 어쩌다 하루 써도 괜찮습니다. 어쩌다 하루 남긴 그날의 느낌이 좋아서 더 자주 쓰고 매일 쓰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