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인 '의식'을 뜻하는 '리추얼'(ritual). 이 단어가 '일상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는 도구' 또는 '나만의 반복적인 행위를 통한 삶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의식'이라는 뜻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4-5년 전 '리추얼'이라는 책이 발간되었고 그즈음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씨가 쓴, 제목이 무척이나 대담한 책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에서도 '리추얼'에 대한 언급이 살짝 있었어요. 책에서 말하는 '리추얼'은 '매일매일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해 나갈 때 삶은 그 자체로 빛날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그런 단어가 제게 잘 와 닿지 않았어요. 저는 매일매일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렇게 매일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비인간적이라고도 생각했어요. '사람이 기계는 아니잖아?' 그랬었죠.
정해놓은 분량을 다 쓰지 않으면 책상을 떠나지 않았다는 스티븐 킹이나 매일 원고지 20장 이상씩을 썼다는 조르주 상드, 자신이 쓴 단어의 개수를 일일이 헤아렸다는 헤밍웨이 등등은 위대한 대가이므로 그들만의 세계에 살면서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는 하늘 끝에 위치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따라 하기에는 저는 한낱 보잘것없는 지상에 발붙인 사람이었기에 따라 할 생각도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그러기가 귀찮기도 했어요. 이렇게 살아도 한 세상. 저렇게 살아도 한 세상인데 뭣 하러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데다가 고되기까지 한 철저한 습관을 몸에 새겨 넣어야 한단 말인가! 생각했었지요.
열심히 살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아지고, 그렇게 살아도 나쁠 것이 없다고 여겼어요. 그렇게 살아왔어도 저의 환경이나 생활의 수준이 급격히 나빠졌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딱 살만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간 의도치 않게 몸과 마음이 아프면서 내적 자아가 삶의 밑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경험을 했어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고 이렇게 살다가는 어느 시기에 삶을 져버린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겠구나 싶을 정도로 저는 절망과 낙담의 골짜기를 헤매 다녔습니다. 지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으며 좌절의 나락으로 저를 몰아세웠어요.
그러다가 올해 들어 나이가 주는 부담감으로 인해 불현듯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몇 년 동안 헤매던 것과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내적 욕구에 불이 붙어버렸습니다. 공자가 말씀하신 지천명.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 나태하고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게 된 거예요.
예전 젊었을 때는 나이 오십에 대한 생각조차 해보지도 않았지만 오십 세 정도가 되면 완전 아줌마, 노인을 대비하는 중장년의 슬프고도 쓸쓸한 시기 정도만을 떠올려 보았을 뿐이었거든요. 무턱대고 젊은 날을 동경하며 외적인 젊음을 되돌리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낭비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좋은 습관을 가져서 내면이 탄탄한 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노력과 시도 역시 해본 적이 드물었어요.
그저 세월에 몸을 맡기고 중력의 부르심을 운명인 양 받들었습니다. 피부가 처지고 주름이 지고 키가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 노화의 과정인 것처럼 여겼고요. 신체가 처지는 만큼 의욕도 노력도 줄어드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50세가 된 올해 저는 사소해 보이는 습관 몇 개를 친구 삼다가 세월을 거슬러 살 수도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었어요. 몸에 맞는 제대로 된 습관 하나씩을 갖게 된다는 것은 제 신체 나이를 거꾸로 돌리는 것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40대 때의 저보다 지금의 제가 훨씬 몸과 마음이 젊은것 같이 여겨집니다. 그래서 '마음먹기'에 따라 십여 년 이상을 나이보다 더 젊게 살 수도 더 나이 들게 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봅니다.
토요일 오전 7시 독서모임. 저도 제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주 토요일을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분들과 책을 매개로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몸이 피곤하거나 아픈 날은 하루쯤은 건너뛰고도 싶습니다만 아직까지는 8개월째 매주 갑니다.
제대로 된 습관 하나 들여본 적 없는 굼뜨고 게으른 몸에 새로운 습관이 덧입혀지기까지는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에 '토요일은 눈뜨면 그냥 간다'입니다. 다른 변명 하나를 대면 수만 가지 또 다른 변명들이 고개 들어 소리칩니다. 제가 토요일 새벽 집에서 뒹굴대며 도로 자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 모든 이유에 두 눈 질끈 감고 문 열고 나갈 수 있는 이유는 저에게 '리추얼'을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롭고 영양 좋은 습관들을 익히고 싶습니다. 그 습관이 저만의 강력한 도구, 절망과 낙담의 골짜기에서 시름하고 있던 저를 일으켜 세우는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독서모임 후 돌아오는 길은 반드시 산책을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머릿속을 비워내고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만 시선을 둡니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욕심과 원망의 마음 자락은 고이 접어 허공에 띄웁니다. 제 속에 그런 감정들을 놓아두기 싫습니다.
공원에 갈 때마다 점찍어둔 호숫가 벤치가 있는데요. 언제나 다른 분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럴 때 절대 옆에 가서 앉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공원을 몇 바퀴 더 돌아요. 자리가 비면 저도 앉아보고 싶기 때문인데 그런 경우를 못 만났거든요.
몇 달 전 흐린 날씨 탓이었는지 때마침 빈 벤치를 만나서 운 좋게 혼자 앉아 시간을 보냈습니다. 습기를 머금기는 하였지만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여 더워도 꽤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었어요. 호수의 잔잔한 물결을 보면서 깨끗이 머리를 비워내기도 했다가 저에 대해 이러저러한 생각도 해보다가 주변을 둘레둘레 살펴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독서모임이라는 습관에 새로운 습관 하나를 더 붙여 독서와 토론과 산책의 하모니를 '토요일의 리추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저는 저를 키우는 중입니다. 이왕이면 잘 키우고 싶고 그래서 잘 자란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습니다.
길에 떨어진 작은 솔방울 앞에서도 걸음을 잠시 멈춰 한참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