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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Oct 13. 2019

금주(禁酒) 8개월.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위기도 기회가 된다는 것을 알 나이

금주 8개월. 맥주 앞에 이대로 무너지는 걸까요?



이틀에 한번 꼴로 맥주 한두 캔을 마시던 저는 올해 초부터 술을 끊었습니다. 술꾼은 아니었지만 같이 사는 남편의 영향으로 맥주를 차가운 음료 정도로 여기며 살아왔었죠. 그랬던 제가 8개월 넘도록 맥주 포함 어떠한 술도 입에 대지 않고 있습니다. 성급하긴 해도 금주에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조금 들기도 합니다.


그런 저한테도 한 번의 위기가 있었어요. 여름휴가 여행지에서였는데요. 37도 폭염을 뚫고 하루 종일 재래시장과 문학관을 돌며 10킬로미터 이상 걸었던 날. 차가운 맥주 생각이 절로 나더군요.


예전엔 하루 종일 땀 흘리거나 지친 일이 있으면 남편이랑 마트에 꼭 들러 맥주를 종류별로 사 와서 집에 오자마자 냉동실에 집어넣었어요. 그 사이 청소하고 샤워한 후 거실에서 TV 켜놓고 늦은 밤 혹은 새벽까지 차가운 맥주를 마셨죠.  방영되는 영화는 분위기만 거들뿐, 맥주가 주인공이었던 재미나고 시원했던 한 때가 있었는데 말이죠.  


땀을 뻘뻘 흘리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잔디밭에서 맥주를 팔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배우 공유를 모델로 한 맥주라서 '공유의 얼굴'이 그려진 입간판이 바람에 펄럭이더군요. '아줌마, 오늘 같은 날은 맥주 한잔 마셔도 돼요. 수고했어요' 하는 것 같았죠. 정말 인간적으로 갈등하게 되는 상황이였습니다.

 

"맥주 한잔 마셔. 그래도 돼. 왜 그렇게 인생 빡빡하게 살아?"

남편까지 옆에서 거들더군요.


일단 남편한테 저는 안 마신다고 했어요. 철없는 남편은 저를 독종 마누라라고 여기고 쪼르르 달려가서 자기가 마실 생맥주 한 잔을 냉큼 사 오더라고요.




그러면서 자꾸만 저한테 한 모금만 마시라는 거예요. 인내심 테스트를 하는 것도 아니고. 비록 입간판이지만 배우 공유가 웃으면서 권해도 눈 질끈 감고 안 마신 제가 설마 남편이 꼬신다고 그걸 마시겠어요???


차가운 맥주 한 모금. 너무  마시고 싶었지만 결국 안 마셨습니다. 그러고는 뭔지 모를 짜증이 나서 남편에게 왜 테이블을 이렇게 놨냐. 저렇게 돌려놔야지. 가방은 왜 여기에 놨냐. 저기로 옮겨라 등등 억지를 부렸어요. 제가 무슨 보살도 아닌데 마음 다잡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청소년 오케스트라단을 공격한 그것은?



그때 잔디밭 한쪽에 설치된 야외 공연 무대로 청소년 오케스트라 단이 올라왔습니다. 한여름밤의 클래식 콘서트가 펼쳐지는 사이 투숙객들은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감상을 할 수 있었어요. 초등학생과 중, 고등학생이 섞여 있는 듯한 오케스트라단이었어요. 모두가 검정 옷을 입고 악기를 연주하더군요.  


음악에 맞춰 성악가의 고운 노랫소리도 울려 퍼지고요.  한여름밤의 더위를 날려줄 클래식과 생맥주의 앙상블. 듣고 보기만 해도 시원했어요.





그때 악기 연주하던 여학생 중 한 명이 '꺅'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음악이 중단되었죠. 야외무대 공연. 풀밭이라는 특성상 불청객이 나타난 거예요. 메뚜기, 사마귀, 기타 등등의 엄청나게 큰 풀벌레가 많기는 했는데요. 그중 한 녀석이 연주하고 있는 여학생한테 달려들 줄 누가 알았겠어요


지휘자 선생님이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했어요.  벌레 무서워하는 여학생의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해 달라는 거였죠. 당연히 이해해 줘야지요. 중년 아줌마인 저는 파리도 무섭더라고요. 지나치게 청동 색깔이 나면서 호전적인 파리(x파리)가 있거든요. 더 큰 풀벌레의 공격 앞에 노출된 '여학생의 비명'. 저는 너무나도 이해가 됩니다. 더 소리 질러도 괜찮습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오고.
실수는 우리 모두가 하는 것.



여학생이 그날의 실수를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자신으로 인해 연주가 중단되고 지휘자 선생님이 사람들에게 사과를 해도 괜찮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혹 단원 중 몇몇이 '너 때문에 연주가 엉망이 됐어.'라고 눈치를 줘도 끄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도 싶었어요.


인생은 그런 자잘한 실수 때문에 무너져 내릴 정도로 약하지 않거든요. 위기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을 벗어나면 그 자체가 또 다른 '기회'가 된다는 것을 이젠 알아요. 중년의 아줌마라서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니 아직 나이 어린 여학생이 알기에는 조금 무리일까요?


여학생은 그날 풀벌레를 만나면서, 저는 금주중 차가운 생맥주를 노려 보면서 인생의 한 순간을 지나왔어요. 실수해도 괜찮아요. 글씨 쓰다가 망친 한 페이지. 넘기면 새로운 페이지가 또 나오잖아요. 거기에 깔끔하게 다시 글씨 쓰면서 시작해 보는 거죠.


저는 생맥주의 유혹에 흔들렸던 저를 '나약하다' 여기지는 않으려고요. 남편이 던지는 '독종이다'라는 말도 저에겐 적합하지 않아요. 저는 그저 위기의 순간마다 흔들리는 저를 바로 세우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 보려고 애쓰는 중년의 아줌마일 뿐이거든요.


가끔씩 대견하다라는 말로 제 스스로를 응원해 주는 날들을 살고 싶을 뿐입니다. 한 여름밤의 이름 모를 여학생과 저에게 시 하나 들려주고 싶어요.  



멀리서 빈다  -  나태주


어딘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그 여학생도 저도. 우리 모두 아프지 말고 이 가을을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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