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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Dec 12. 2019

게으른 엄마가 아이를 잘 기를지도 모른다.

유대인 교육, 하브루타의 힘

사랑도 지나치면 병이 되고, 잘못된 사랑은 상대방을 망치기도 한다. 남녀 간의 사랑에만 한정 지어 하는 말이 아니다.  특히 자녀교육에 있어서 과도하거나 맹목적 사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부모들은 때로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 자식이 하는 모든 일은 다 허용이 되고, 내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부모의 희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희생'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위해 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하는지... 희생한 측의 오랜 고달픔도 싫고, 희생 받은 측의 어쩔 수 없다는 당연함도 몹시 거북하다. 어느 한 쪽을 잘 살리기 위해서 다른 한쪽은 못 살아도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느냐라는 뻔뻔한 논리를 나는 너무 싫어한다.


그럴 바엔 양쪽 다 적당히 그냥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상생이라는 말을 두고 왜 희생을 논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희생'은 늘 강자보다는 약자가 치러 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더 마음에 안 든다.

아이 교육에 모든 것을 거는 부모들은 '희생'하고 '미루기'의 달인들이다. 자신을 헌신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쯤은 개가 물어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성공 가도에 올라설 자식을 위해서라면 부모의 행복쯤은 유보되어도 괜찮다고 여긴다.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불합리하거나 부도덕한 일도 서슴지 않는 부모들의 양면성을 맞닥뜨리게 될 때면 우울하고 슬퍼진다.





'유대인의 힘'을 쓴 저자 사라 이마스는 중국에서 살다가 이스라엘로 이민 간 유대인이다. 그런 그녀가 싱글맘으로 자식 셋을 훌륭하게 길러 낸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중국과 이스라엘의 교육관의 차이가 확연하다. 특히 중국의 대학 근처 여관방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부모들이 가득하다고 해서 놀랐다. 타지로 보낸 자식의 대학 생활을 곁에서 보좌?해 주기 위해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부모라니... 어느 나라나 헬리콥터 부모는 다 있나 보다.


단 예외가 있다. 이스라엘이다. 유대인 부모들은 다르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유대인 교육이 특별한 것이다. 유대인 부모들의 자식 교육의 궁극의 목표는 자식이 진취적 마음가짐을 길러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자립심을 길러 주기 위해 없는 결핍을 만들어서라도 경험하게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우리나라나 중국의 부모들처럼 부모는 희생하고 고생해도 자식만 귀족처럼 떠받들 듯 키우는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유대인은 사람의 운명은 세찬 물살을 타고 내려가는 '조각배'이며 역경 지수는 각자의 손에 들린 '노'라고 생각한다. 저마다 그 노를 어떻게 젓느냐에 따라 빛나는 피안에 가 닿을 수도 있고 물살이 흐르는 대로 이리저리 떠돌 수도 있다. 55


식의 모든 것을 떠맡아 해주는 부모들은 아이의 역경 지수를 끊임없이 낮추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이는 사소한 실패와 시련 앞에서도 극복하고 일어설 힘을 기르지 못한 채 성인이 되어 버린다. 이럴 경우 진정한 독립은 요원한 일이 되는 것이다. 자식에게 닥쳐 오는 운명의 물살을 헤쳐나갈 힘을 부모가 길러주지 않으면 결국 그 물살에 삼켜지는 건 자식이 되고 만다. 부모가 언제까지 자식 곁에서 자식의 삶을 같이 살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이가 자립할 수 있도록 아주 어린 나이부터 가사일 분배와 용돈 벌기를 통해 노동의 중요성과 경제관념을 가르친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주체적 활동을 이스라엘의 꼬마들은 거뜬히 해낸다. 자녀 교육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와 합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하는 부분이다.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관에서 인상 깊었던 단어는 '태만한 양육'과 '적당한 불만족'이었다. 우리나라나 중국의 부모들은 아이 곁에 온종일 붙어서 헌신하고 그러지 못했을 경우엔 스스로가 태만했다고 죄책감을 느끼곤 하는데, 작가는 오히려 부모가 적당히 태만해야 아이가 독립적으로 자랄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를 움켜쥔 손에 힘을 빼고 아이의 실수와 아이의 좌절도 보아 낼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태만한 양육'은 가정 교육이라는 길 곳곳에 주유소를 세우는 것과 같다. 부모에게는 쉬어가는 기회가 되며, 아이에게는 스스로 달릴 수 있는 연료를 채우는 기회가 된다. 이 양육법이야말로 아이가 최선을 다해 인생길을 전진하고 더 멀리까지 달릴 수 있도록 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인 셈이다. 138


또한 유대인들은 지나친 풍요로움이 아이에게는 독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과도한 만족'을 '보이지 않는 가정 폭력'으로 여겨 금기시한다. 그들은 자녀 교육으로 '만족을 지연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이가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에 익숙해지면 책임감 없이 무계획적으로 돈을 낭비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될 가능성이 많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항상 경계한다.


유대인 부모는 아이의 불합리한 요구를 '적당히 불만족'시키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아이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아이가 바라는 바를 무조건 들어주는 것은 '사랑'의 탈을 뒤집어쓴 '해악'이다. 유대인 부모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차라리 대충 키울망정 '과도하게 만족' 시키진 않겠다." 152


여러 번 화초를 죽였던 경험이 있는 나는 잦은 물 주기가 그 원인임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은 여간해선 화초에 물을 주지 않는다. 정말 물이 필요해 보일 때 준다. 


화초를 통해 '내버려 두기'를 배웠지만 자식 교육에 있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자녀 교육에 목을 매고 싶지는 않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는 나 자신도 사랑하니까. 그래서 나는 희생하는 쪽 보다.... 아이와 나, 둘 다 대충 사는 쪽을 택했다. 우리는 정말로 적당히 우리 식대로 살기로 했다.


나의 자녀교육 목표는 단 하나, 자립이다. 아이 스스로가 자기 밥벌이를 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능력과 혼자 어디든 가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배포로 정신적 독립을 하는 것. 그래서 아이 혼자만 아주 행복한 삶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누구 한 명 누락됨 없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나의 바람이고 내가 꿈꾸는 인생이다.


모든 일은 다 잘 될 거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다 잘 된 일, 다 좋은 일일뿐이다. 그것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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