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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아 Sep 06. 2022

#8 강산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


 노래를 안 한지도 벌써 2년이 되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다. 음악을 하고 싶다고 집에 알렸을 때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예술가는 가난하다고, 평생을 손가락을 빨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부모님의 걱정 어린 당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한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좋아 부모님을 설득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수강신청에 실패해 남아있는 자리 하나에 억지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의 수업이 ‘대중음악의 이해’였다. 교양수업 치고는 담당 교수가 빡빡한 데에다가 주 교재 집필에 참여한 전공자의 팀 티칭으로 강의가 이루어져서 전공 수업만으로도 벅찬 탓에 듣기 꺼려하는 수업이었다. 어영부영 듣게 된 강의였지만 산은 꽤나 즐거워했다. 전공 수업보다 더 높은 집중력을 보여주었고 수면 시간을 포기하면서까지 교양 수업에 매달렸다. 문학, 역사학, 음악학, 사회학, 매스미디어학, 경제학, 인류학 등 학제 간 영역이 겹쳐지는 부분들이 많았는데 산은 작은 것 하나도 놓칠 수 없어 밥을 먹을 때에도, 다음 수업을 가는 길에도 언제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작곡 배워볼래요?”

 수업이 마치고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산을 붙잡고 팀티처가 물었다.

 “저요?”

 “네, 산이씨요. 그 정도 열정이면 제대로 배워봐도 될 것 같은데요?”

 열정만큼 산의 작곡 실력은 뒤따라오지 못했다. 뒤따라오지 못했다기보다는 트렌드를 읽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산의 목소리는 좀처럼 흔하지 않았다. 어딜 가든 튀었다. 저음이었지만 노래를 할 때는 묘하게 간드러졌다. 돌이켜보면 작곡이 아닌 노래에 재능이 있었던 것도 같다. 중고등학교 때 음악시간에도 반에서 노래 잘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같은 반 학우들은 하나같이 산을 지목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앞으로 나가 노래를 곧잘했다.

 목소리만 가지고 음악을 제대로 시작하기엔 실력이 출중한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그렇다고 산이 운이 좋은 편도 아니었기에 같이 그룹을 이룰 사람이 필요했다. 팀티처의 도움으로 산이보다 3살 많은 공대생을 소개받았는데 성격도 시원시원한데 섬세했고 압력밥솥에서 취사될 때 나는 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퍽 마음에 들었다.

 주로 이태원이나 홍대 라이브클럽에서 공연을 했다. 주로 산이와 같이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게 된 인디밴드들이 공연을 할 수 있는 인큐베이터와도 같은 공연장이다. 풍족한 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활동을 하다 보니 산이 그룹의 공연을 찾아오는 관객들도 생기고 커뮤니티에 종종 좋은 이야기들이 올라와 힘들어도 버틸 수 있었다. 천천히 한계단 한계단씩 단계적으로 성장을 하고 있던 무렵에 중국에서 시작한 전염병이 한국에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러다 말겠지, 원래 뉴스는 작은 일도 크게 부풀리기 마련이니까, 라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춘 채 예전보다 줄어든 공연 수입을 계산하며 중얼거렸다. 친해진 또다른 인디밴드들과 클럽 사장님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이젠 버티는 것도 한계야.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잖아? 난 사실 길어봤자 6개월이면 다 끝날 줄 알았지. 이렇게 오래갈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 내가 너희들한테 공연장을 마련해 주어야 너희도 공연하고 밥 벌어먹고살 수 있는데.”

 한숨이 깊어졌다. 자신이 노래를 마음껏 듣고 싶어서 라이브 클럽을 운영하게 되었었다는 사장님도 어느새 코로나19 앞에 무릎을 꿇었다.

 “웃긴 게 뭔지 알아? 코로나 단계가 떨어졌는데 우린 여전히 공연할 수가 없어. 영화관이나 연극이나 뮤지컬은 좌석 띄어 앉기가 가능한데 우린 안된대. 우린 여전히 지하에 갇혀있어.”

 “우리도 띄어 앉으면 되잖아요. 우리도 의자 마련해서 한 칸씩 띄어서 앉으면.. 예전보다 손님은 줄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잖아요.”

 “나도 답답한 마음에 옆 사장님이랑 문체부나 다른 관계 부처에 연락했는데 노래를 따라 부르기 때문이래. 떼창을 해서 안 된대.”

 그렇게 한동안은 또 공연을 할 수가 없었고 낮엔 조그만 회사들이나 아르바이트 몇군데를 전전하며 생업을 겨우 이어갔고 밤에는 작은 원룸에서 형과 노래를 만들곤 했다.

 “이제 우리도 공연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거리두기 완화되었던데.”

 “안 그래도 어제 신고했어. 공연하겠다고.”

 약 1년만이었다. 길거리 버스킹을 해볼까도 싶었지만 이제 조금씩 유명해지고 있는 터라 작은 구설수조차 조심스러워 참아왔었다. 움츠려있었던 시간을 보상받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때보다 준비에 공을 더 들였다. 공연을 시작한 지 10분 만에 공연이 중단되었다. 구청 공무원들이 들어와 코로나 2단계 때에는 일반 음식점에서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등의 공연 행위 자체를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중단하세요. 세종문화회관 같은 곳이 공연장이지, 라이브클럽 공연은 음식점에서 칠순잔치하는 거랑 똑같아요. 라이브클럽은 식품위생법에 따라야 해요. 중단하세요, 예? 중단하세요.”

 ‘나’로써 존재할 곳을 잃은 산은 이제 그만 음악을 포기하고 싶었다. 인디밴드들을 여전히 무시하고 있는 한국 문화 속에서 산이 설 곳은 없었다.

 산은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작은 배낭만 하나 메고 돌연 제주도로 떠났다. 해외로 떠날까도 싶었지만 그만큼의 돈은 없었다.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가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묵었다. 낮에는 방에 틀어 박혀 밀린 잠을 자기도 하고 읽고 싶었던 책을 쌓아놓고 읽기도 했으며 민박집 마당에 가만히 앉아 지나가는 구름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면 민박집 근처를 산책했는데 조용한 재즈 바가 하나 있었다. 낮에는 음식점으로 운영되었고 해가 지면 재즈 바가 되는 곳이었다. 음악에 대한 편식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재즈는 들을 일이 잘 없어서 생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즈바에 있는 은은한 조명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노래와 잘 어우러졌다. 산이 제주에 내려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푹 쉬고 싶은 마음으로 내려온 제주인지라 산이는 일정한 수입원도 없었고 모아놓은 돈들은 공연을 못 했던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금씩 쓰다 보니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재즈바 안에 들어가서 편하게 노래를 들으려면 음식이나 주류를 시켜야 하는데 적게는 13,000원부터 많게는 30,000원까지 냈어야 했는데 산이에는 그것조차 낭비로 느껴졌다. 가게 가까이에서 듣기에는 가게 주인의 눈치가 보여 모퉁이에서 서성거리다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구석에 쪼그려 앉아 한두 곡을 듣다가 돌아가곤 했다.

 “안에 들어와서 편하게 들으시는 건 어때요?”

 가게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스포츠머리에 두건을 두른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나와 물었다.

 “저.. 죄송해요, 돈이 없어서..”

 “괜찮아요. 자주 오셨잖아요. 오늘은 들어와서 편하게 듣고 가세요.”

 생긴 것과 다르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구석 자리에 앉아 주인이 내어준 생맥주를 마시다가 재즈를 들으며 울었다. 산이가 우는 이유가 맥주가 맛있어서인지, 주인이 고마워서인지, 노래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노래를 하던 자신이 그리워서인지 알 수 없었다. 산이는 가게가 닫을 때까지 구석 자리에서 기다렸다가 의자를 올리는 일까지 도와주고 나왔다.

 “술 한 잔 더 할래요? 재료가 남았는데 놔두면 버려야 해서요.”

 산이는 처음 본 가게 주인과 동틀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일을 했으면 좀 달랐을까요? 노래 하나만 보고 살기엔 현실이 너무 무거워요."

 “내일부터 우리 가게 나올래요? 내일 저녁부터요. 우리 가게에서 요리 잡일도 좀 하고 재즈 선곡도 하고 청소도 하고,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해 볼 생각 없어요?”

 고민도 없이 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직장이었다. 직장이라기엔 아르바이트이지만. 적은 돈이지만 다달이 들어오는 수입이 생겼고 일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다시 서울로 돌아갈 마음이 싹텄다. 가게를 하나 내야지, 나도 이런 작은 가게를 내서 사람들한테 노래 들려줘야지, 라며 산은 제주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산이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홍대 라이브클럽 중 절반은 문을 닫았고 절반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운영은 되고 있었다. 산은 망원동에 작은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언젠가 다시 라이브클럽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지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자작곡을 선보이기엔 현실이 무섭고 무거웠다. 오픈 전 감바스에 곁들일 바게트를 사기 위해 가게 근처에 있는 빵집에 들렀다.

 “어서오세요.”

 “바게트 있나요?”

 “아, 5분만 기다리실래요? 방금 막 나와서 좀 식어야 하거든요.”

 같이 활동하던 형이 여기 빵이 맛있다고 극찬하던 것이 문득 기억이 났다.

 “저 그 노래 엄청 좋아했어요, 시소.”

 “어? 저 아세요?”

 “알죠, 홍대에서 공연하는 거 종종 봤어요.”

 “고마워요. 공연한 지 오래돼서 기억하는 사람 없을 줄 알았는데.”

 “좋은 노래는 죽어서도 남아요.”

 “저 옆옆에 가게 오픈했어요, 놀러 오세요. 맛있는 요리 한 번 해드릴게요.”

 산은 발걸음이 500그램 정도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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