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
8시 16분.
희수는 알람이라도 맞춰놓은 것마냥 늘 같은 시간에 빵집에 들러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에그마요 샌드위치를 산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늘 가던 빵집이 문을 닫아 아침을 거르던 희수였는데 그 가게가 이름만 바꾸고 다시 열어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이상했다. 빵집 이름이 카스테라라니. 달콤한 빵을 좋아하지 않아, 처음에는 카스테라 전문점인지 알고 아쉬워했었는데 카스테라를 팔고 있지 않는 이상한 빵집이었다.
“대리님 그거 들으셨어요? 영업팀 브파인더 고소당했대요.”
희수가 출근하자마자 옆 팀의 한 부장이 직장 내 성추행으로 경찰에 고소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많은 그에게도 이것은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고소를 한 사람은 희수의 입사 동기였는데 밤마다 동기들에게 돌아가면서 전화를 하여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같은 팀인 직원은 모르고 있다. 이 고소 사건에 희수도 동참했다는 것을. 매일 밤마다 전화에 시달리는 동기들,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 동기에게 증거를 모아 고소를 진행하자고 권유하였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탕비실로 들어갔다.
두 번째 직장이었다. 전에는 응급실 보안요원으로 일을 했었다. 평균보다 10센티미터는 큰 키와 태생적으로 근육질인 몸을 가져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직업을 선택한 것 같았다. 주로 응급실에서 주취 폭력자들을 대했는데, 이들은 술에 취해 싸우거나 넘어져서 다치거나 엉망이 된 상태로 응급실을 찾아온다. 희수는 보안요원으로 1년 동안 근무를 하면서 그들이 휘두른 주먹과 발길질에 하루가 머다 하고 온 몸에 멍이 들었다. 사실 일하는 시간보다 대기하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어쩌다 한 번 겪는 일이 너무 험했다. 옆 테이블과의 싸움으로 이마가 찢어진 환자가 경찰들의 실수로 같은 응급실에 실려온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을 보았고 그 순간 의사와 간호사들을 밀치고 주먹을 휘둘렀다. 이를 막고자 희수가 달려들었는데 그 남자의 주먹에 코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희수는 사무직을 할 거라며 보안요원을 관뒀다. 정시퇴근이 어려운 날이 더 많았지만 오늘 하루도 무사한 자신의 코를 보면서 만족해했다.
쾅.
늘 순하다고만 생각했던 희수의 쌍둥이 누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방문을 세게 닫고 들어가서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번에 들어온 대학생 인턴들이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영상을 하나 보고 있었는데, 희수는 이상하게 영상 속 폴댄스를 추고 있는 여자가 자신의 누나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8시 23분.
정해놓은 시간에 알람이 한 번만 울려도 침대에서 곧장 잘 일어나는 희수였는데 이 날따라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해 평소보다 7분이나 늦게 카스테라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본인이 정한 계획이 꼬여 언짢았다. 희수는 지긋지긋해했다. 아무도 만들라고 강요하지 않은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그 안에 자신을 집어넣어 통제하는 것을. 언제든 그 경계를 스스로 깰 수 있었지만 희수는 지겨워하면서도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동시에 답답함도 느꼈다. 남들이 들으면 알만한 대기업의 임원 자리를 꿰차 앉은 아버지와 일평생을 그를 내조하며 자신과 누나에게 공부만을 강요하며 살아온 어머니를 보면서 반항심을 느꼈다. 그것도 다 큰 성인이 되어서야 말이다. 반항심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응급실 보안요원이 되기로 했던 것이었다. 비록 지금은 관뒀지만, 어른들은 희수에게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온 것 같다 하였다.
에그마요 샌드위치를 골라 계산하기 위하여 카운터로 걸어가는데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다급하게 희수를 밀치고 카운터로 뛰어들어갔다. 희수는 놀라 손에 쥐고 있던 샌드위치를 떨어뜨렸다. 새로 오픈한 레스토랑에 가져다 줄 바게트를 커팅하기 위해 뒤돌아있던 선아가 부산한 소리들에 놀라 돌아봤을 때 이미 그 남자는 선아의 한쪽 팔을 붙잡고 억지로 반 바퀴 돌렸다. 꼼짝없이 선아는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쇠로 된 빵 칼을 빼앗겼다. 저 녀석 초짜네,라고 희수는 생각했다. 어떤 강도가 빵집을 터냐고, 그것도 오픈한 지 며칠 안 된 빵집을. 어라, 심지어 빵 칼도 뒤집어 잡았네. 희수는 속으로 비웃었다. 1년의 경험의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샌드위치를 다시 가져다 놓고 나가는 시늉을 하면서 카운터 쪽을 살짝 쳐다봤는데 거의 체념하고 있는 듯한 표정의 선아와 눈이 마주쳤다.
카운터 쪽으로 달려가기 직전 희수는 생각했다. 이 빵집 문 닫으면 내 아침 스케줄이 꼬여버려.
재빨리 그의 손을 낚아챘고 손목을 꺾어 쥐고 있던 빵 칼을 떨어뜨리게 했지만 초짜인 티가 나는 그는 이빨로 덤벼왔다. 보안요원이었더라면 참았겠지만 지금 그는 일반인이었다. 가벼운 발놀림으로 그의 뒤로 돌아가 목을 감고 112에 신고하라고 선아를 향해 외쳤다.
희수는 오늘도 스스로를 위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