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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 이야기

002. 식어버린 술

by 한량돌

구지봉 의례가 모두 끝나고 난 늦은 밤, 금관의 맹주 구야국의 대접견실.

각 가락의 색이 먹여진 깃발 아래 아홉 가락의 대가한들과 뒤따른 십 수 명의 가한들이 모여 앉았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노고가 많았습니다들. 자, 한 잔씩.. 많이 뜨겁습니다."

금관의 대가한 이시품이 곡주를 따르며 말했다.


"오.. 살아있군요.. 헌데, 오늘 의례에 새녘의 거칠산국과 장산국은 왜 보이질 않습니까?"

"돌연 참석을 거부했다는 말이 있던데, 가락의 이름으로 한데 모이는 이 엄숙한 날에..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요..?"


이시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요즘 계림과 내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성진의 대가한 유충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니, 금관은 우리 가락의 어느 결집보다 튼튼하지 않았습니까? 시조 대가한께서 일궈내신 땅에서 모든 가락의 패권을 누리고 있는데,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다니요! 허 참!"


"벽산국 가한이여. 오늘의 자리에는 빈정이 적절치 않습니다."

아라의 대가한 염덕이 붉은 옷깃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윽고 비화의 대가한 창화가 벌떡 일어섰다.

"역시 계림 놈들에게 제대로 한 번 들이받는 것이 맞습니다! 이러다간 차례로 고령 가락의 최후를 맞게 될 것이오!"


"아무래도 지금은 시기가 맞지 않아요.. 가우리에 밀려난 백제가 서녘의 기문국을 되찾으려는 모양입니다. 쉽게 결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계림이 결국 이빨을 드러내면 그 영향이 남녘에 미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럴 때일수록 가락의 결집을 공고히 해야 할 때입니다! 본때를 보여줘야 할 때 라구요!"


창화의 일갈에도 별 관심 없다는 듯, 소가락의 대가한 차아는 손가락에 주렁 한 반지를 보며 푸념했다.

"그럼 어렵게 확보한 기문국의 철광맥을 그냥 포기하라는 건가요? 이제야 북큐슈에서 인력을 끌어오고 있는데."


"차아 가한의 말이 맞습니다. 요즘 같은 혼란스러운 시기에 교역량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려고 다들 애쓰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장내의 분위기를 살피던 유충은 이시품과 창화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기문의 철광 사업은 저번 의례에서 전 가락 결집의 최우선 과제로 결정된 것입니다. 저번처럼 비화 가락이 독단적으로 계림을 공격한다면 우리 가야산 측에서는 고민이 깊어질 겁니다. 저번처럼 미련하게 힘을 보태지는.."


"미련하게? 지금 미련하다하셨소? 우리가 최전방에서 계림을 견제하기에 그대들이 배불리 곳간을 채울 수 있는 것임을..!"


"갑작스레 상의도 없이 기습하여 그 많은 군사를 사지에 쏟아부은 것도 가락을 위해서였습니까?! 매번 이리 뜻을 합치지 못하니, 지키지 못하고 내어주기만 하는 거요!"


"그만!!... 후... 두 분은 그만 화를 거두시죠.."

대가락 반파국의 이지림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열 오르던 장내는 가을이 뿌리는 소슬바람에 서늘하게 식어갔다.

이윽고 이지림이 이시품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다른 각지의 가한들도 하나 둘 빠져나가고 자리에는 금관의 가한들만 남았다.


"오늘은 곡주가 밍밍한 것이 술맛이 영이군요."

이시품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시조 대가한께서 탈해를 내쫓을 때만 해도 계림은 그저 해안의 작은 부락이었는데.. 어찌 이리 골머리를 썩이게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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