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의 교실은 유독 아늑하다
유진은 성적표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지?'
때는 고3 3월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오는 날, 유진은 두 눈을 의심했다. 항상 전교 1, 2등을 놓고 다투며 최상위권을 달리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숫자는 늘 친절하지만은 않았다. 지금까지 이렇게나 미끄러진 적은 없었다. 이번 성적표는 그야말로 그녀에겐 충격적인 재앙이었다.
"3월 모의고사 성적이 수능까지 그대로 간다."
이번 모의고사를 치르기 전, 주위 어른들과 학원 선생님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 시험을 치는 내내 이 말 한마디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필요 이상으로 긴장을 한 탓에 1교시 국어 시험을 완전히 망쳐버린 것이다. 종잇 속 엉망인 숫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진은 또 불안에 휩싸여 숨이 턱 막혀왔다.
유진은 어릴 적부터 ‘성공’이라는 두 글자를 품고 살아왔다. 그리고 목표는 단 하나, S대 의과대학. 성적에 대한 욕심이 누구보다 큰 엄마 밑에서 자란 유진은, 흔히들 말하는 ‘00동 키드’의 전형이었다. 학원과 과외, 그리고 방학 때마다 이어지는 기숙학원 생활. 이렇듯 그녀의 삶은 대부분이 시험지를 풀고 성적표를 받아 드는 일로 채워졌다. 대학을 향한 노력만큼은 누구와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학년이 오를수록 그녀의 성적 강박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스스로를 옥죄어 왔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5시간 채 되지 않았고, 잠시라도 펜을 놓으면 불안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마음은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이게 뭐냐고 도대체! 엄마한텐 어떻게 말하지? 이딴 성적표를 들고...?'
불현듯 떠오른 엄마의 얼굴에 유진은 고개를 쉽게 들 수 없었다. 엄마의 싸늘한 표정과 냉담한 목소리가 그녀 머릿속에 그려지자, 유진은 지금 당장 학교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아, 국어 성적이 왜 이러니? 어디 아팠어? 갑자기 이렇게 미끄러지면 어떡해."
성적표를 내밀며 건넨 담임 선생님의 한 마디는 종이를 받아 든 손끝의 냉기보다도 더 차갑게 유진의 가슴을 스쳤다. 최상위권 학생이니만큼 그녀는 교내 선생님들에게서도 많은 기대를 받고 있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것이 때론 그녀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유진은 완전히 풀이 죽은 채로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창밖으론 이른 봄 햇살이 교실을 가득 채웠다. 쥐 죽은 듯 조용하고, 그중에서도 고3의 교실은 유독 아늑하다. 그리고 학생들은 알고 있다. 종이 한 장 위에 적혀 있는 여러 숫자가 자신을 규정한다는 것을.
유진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꽃잎이 살랑살랑 바람을 타며 날아들었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냥...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 한낱 흩날리는 존재로...'
처음 금호 고등학교를 입학했을 때부터 유진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S대 의대 합격.' 일단 이곳에 합격만 한다면, 그다음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괜찮다며 스스로를 다독여 왔다. 유진의 궁극적인 목표는 오로지 대학 입학뿐이었고, 그것을 위해선 현재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여겨왔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어느새 유진에겐 학업에 대한 회의감만이 서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보장되지 않는 결과와 보이지 않는 미래. 그것들이 불안과 압박 속으로 자기 자신을 밀어 넣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1등급, 2등급, 3등급... 그렇게 등급으로 매겨진 숫자는 날이 갈수록 유진의 숨통을 조여왔고, 어깨에 짊어진 책가방은 해마다 더 무겁게 늘어만 갔다. 그리고 그 무게는 어느새 그녀의 삶 전체를 짓누르는 짐이 되어 있었다.
탁탁!
유진이 한참 심연에 잠겨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담임 선생님이 교탁을 치며 말했다.
"자! 다들 성적표 받았지? 보니까 너네 그 성적 가지곤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 애들이 별로 없어. 냉정하게 3월 모의고사 성적이 그대로 수능 성적으로 따라가는 일이 많다고, 알겠어? 더 열심히 하자."
선생님의 말씀엔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다들 고개를 숙여 흔들리는 동공으로 성적표를 쳐다볼 뿐이었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반면에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친구들도 보였다. 고작 종이 한 장이 이렇게, 한 공간 속에서 여러 희비가 엇갈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렇게 고요한 적막 속에서 고3의 수업은 시작되었다.
휘이이잉~
선선한 봄바람이 창문틈으로 새어 나와 유진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고3 교실의 아늑함이란, 긴장과 불안이 서로를 꼭 껴안은 채 웅크리고 있는 그들의 숨소리일지도 몰랐다.
띵동~ 띵동~
어느새 하교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유진은 오늘 하루 동안 단 한 수업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머릿속엔 온통 모의고사 성적표만이 깊게 뿌리 박혀 있었다. 유진은 혼이 나간 상태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누군가가 유진의 이름을 세차게 불러댔다.
"야~ 유진! 같이 가!" 뒤를 돌아보니 서영이 그녀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서영은 초등학생 때부터 유진과 알고 지낸 그녀의 단짝 친구였다. 뿐만 아니라 엄마들끼리도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기에 어릴적부터 유진의 비교 대상이자 라이벌이기도 했다.
"이번에 모의고사 잘 봤어?" 서영이 물었다.
"망했어. 국어가 3등급이야."
"어?"
서영은 적잖이 놀랜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국어는 유진이 가장 자신 있어하는 과목 중 하나였다. 심지어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국어 1등급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반면에 서영은 이번 모의고사에서 꽤나 괜찮은 성적을 받은 모양이었다. 유진은 조금만 툭 건들어도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땅바닥만 보며 걸었다.
"학원 갈 거지?" 서영이 조심스레 유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목요일, 하필이면 국어 학원에 가는 날이었다. 유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렇다고 학원을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한숨이 반쯤 섞인 목소리로 유진은 대답했다.
"가야지 뭐."
"야!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서영이 불쑥 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됐어. 밥맛 없어 지금.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었단 말이야."
"에이... 이럴 때일수록 맛있는 거 먹어야 되는 거야. 따라와 오늘은 내가 떡볶이 쏜다!"
서영은 그런 친구였다. 차갑고 도도하게만 보이는 유진과는 달리, 밝고 기운차며 어떻게 하면 매일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긍정적인 아이. 유진은 그런 서영을 존경과 동시에 질투로 바라봤다. 성적은 유진보다 한 수 아래일진 몰라도,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있어선 서영은 그녀보다 몇 수나 위에 있었다. 자신은 조금만 성적이 안 나와도 곧바로 우울해지는데 반해 서영은 성적이 잘 안 나오더라도 좀처럼 기가 꺾인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적어도 유진 앞에선 그랬다. 서영은 언제나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라며 자신을 위로했고, 공부가 인생에 전부는 아니라는 흔해 빠진 소리로도 자신을 달랠 줄 아는 아이였다. 유진은 그런 서영이 부러웠다. 조금의 질투를 느끼는 자신을 한심해하면서까지.
그렇게 둘은 학교 근처 오래된 분식집 앞에 다다랐다. 안으로 들어서자 튀김 기름 냄새와 매콤한 떡볶이 국물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하교 시간대라 가게 안은 학생들로 붐벼 있었고,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웃음소리와 수다 소리가 좁은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자리가 딱 하나 남아 있었기에 서영과 유진은 그곳에 나란히 앉았다.
"이모~ 여기 떡볶이 4인분이요~!"
"야, 왜 이렇게 많이 시켜."
"나만 믿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고, 그들은 수다를 떨며 맛있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서영은 유진의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이런저런 재밌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결국 유진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여자 애들끼리 모여서 하는 얘기야 늘 그렇듯 언제나 다채로운 법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성적, 대학, 입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고3이었다. 그래도 서영과 함께 수다를 떨 때면, 유진은 평소에 자신을 옭아매었던 걱정거리들이 잠시나마 잊히곤 했다. 여자 아이들에겐 친구들과 이런저런 주제로 수다를 떠는 일만큼 중요한 게 없다. 그건 유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 잘 먹었다." 서영이 만족한 듯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덕분에 잘 먹었어. 고마워."
"그것 봐. 기분 어때? 좀 나아지지? 잘 먹던데 우리 유진 씨."
유진은 옅은 미소로 답했다. 서영은 원래부터 먹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지만, 오늘만큼은 유진도 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끼니다운 끼니를 거른 탓에 젓가락이 멈출 새 없이 분주히 움직였다. 꿀꿀한 날엔 역시 맛있는 음식이 가장 확실한 위로였다. 그제야 유진은 어깨에 걸린 긴장이 조금씩 풀리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소화를 시킬 겸 앉아있던 서영은 문득 시계를 보았다. 그러자 쥐도 새도 모르게 지나간 시간에 화들짝 놀랐다. 곧 학원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유진! 이러다 학원 늦겠어. 빨리 가자!"
"어... 어!"
"유진아. 이게 뭐니?"
"죄송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학원 선생님은 유진의 성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했다. 유진은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떡볶이를 먹고 나아진 기분은 금세 날아가 버렸다. 마치 후- 불면 날아가는 민들레씨처럼, 사람의 마음은 늘 이렇게 기대와 좌절 사이를 오가는 법이었다.
"너 S대 의대 목표로 공부하는 거 아니었니?"
"네..."
"지금껏 잘해 왔잖아? 근데 고3 돼서 스타트가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심화반에서 이런 점수는 처음 본다 유진아. 어머니는 아시니?"
유진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이럴 땐 그냥 침묵을 지키는 게 나았다. 어차피 그 어떠한 말도 지금은 변명으로만 들릴 것이 분명했다. 물론 딱히 핑곗거리랄 것도 없었다. 긴장한 탓에 시험을 못 봤다는 것은, 그것도 실력이었다. 유진은 갑자기 숨이 턱 막혀오면서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부끄러움과 수치심보다도, 평소에 잘하던 과목을 망친 것에 대한 자존심보다도,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대접받기보단 오로지 성적에 의해 좌우되는 정체성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후... 일단 들어가. 수업 시작할 시간이다."
마지못해 건넨 선생님의 한숨 섞인 말은 그녀의 가슴을 파고 찔렀다. 걱정의 한숨일까, 원망의 한숨일까, 보잘것없는 놈에 대한 한심일까. 유진은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강의실에 들어가 앉았다.
'나는 공부를 왜 하고 있지?'
스스로 목을 조르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어느 정도 유진 본인도 이 부분에 대해선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난 대학을... 왜 가려하는 거지?'
지금까지 주체적으로 주어진 문제를 풀어나간 적도 없었다. 언제나 남이 제시한 답과 해설만을 믿고 살았다.
'내가 좋아하는 거...? 하고 싶은 거?'
그러다 보니 취향과 개성이란 것은 생각지도 못할 단어였다. 자신이 스스로 무언가를 시도해보려 한 적이 있었던가?
'애초에 나는 정말... S대 의대를 가고 싶어 하는 게 맞는 걸까?'
자신이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누군가가 그녀의 손으로 스스로를 조르도록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유진은 수업 시간 내내 심연에 잠긴 채로 손에 쥔 연필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불쌍해 보였다. 그녀는 팔꿈치를 책상 위로 올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결국 남몰래 눈물을 찔끔 훔치고야 말았다. 하지만 슬퍼할 틈도 없이 곧 선생님의 말씀이 유진의 틈을 파고들었다.
"정유진 집중해라."
유진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앗... 네...!"
"괜찮아?"
서영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아마도 서영은 유진이 남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던 걸 보았으리라.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유진의 표정은 아까보다도 더 침울해져 있었다.
"몰라. 이대로 어떻게 엄마 얼굴을 봐야 할지 모르겠어. 집에 들어가기 싫어." 유진이 앓는 소리로 대답했다.
결국 학원에서도 그녀답지 않게 수업 내용을 거의 다 놓쳐버렸다. 유진은 그런 자신이 또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서영은 걸어가는 동안 내내 그런 유진을 걱정했다. 유진의 엄마가 그녀의 성적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걸 서영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진이 성적에 그토록이나 집착하고 매달리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서영은 분위기라도 띄워볼까 싶었지만 곧 마음을 접었다.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불편했어도 유진의 마음이 이해되었기에 서영은 애써 침묵을 지켰다.
둘은 한참 동안이나 말 한마디 없이 걸었다. 그러자 곧 그들이 다니는 학교인 금호 고등학교 후문 쪽에 다다랐다. 유진과 서영은 항상 이곳에서 헤어졌다. 이 골목을 두고 집의 방향이 갈리기 때문이다.
"야, 괜찮아. 힘내! 어머니께서 잘 이해해 주실 거야."
서영이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유진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유진은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을 서영을 보며 말했다.
"야. 너도 우리 엄마 성격 잘 알잖아. 이해해 주긴 개뿔. 난 오늘 죽을지도 몰라."
서영은 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자, 맥없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들어가."
유진은 체념한 듯 아무런 대답 없이 손을 흔들며 답했고 곧바로 뒤돌아 서서 걸었다. 서영은 한숨을 크게 한 번 쉬며 유진의 씁쓸한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도저히 집에 들어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유진은 이내 가던 길을 멈추고 가방에서 모의고사 성적표를 꺼냈다. 성적표를 손에 쥐자마자 떠오른 건 그 위에 적힌 숫자들과 겹쳐 보이는 엄마의 얼굴이었다. 엄마의 숨소리,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표정과 냉소 섞인 말투. 그 안에서 유진은 언제나 부족한 존재였다. 오늘은 도저히 엄마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국어가 3등급..." 그녀는 갑자기 충동에 휩싸였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성적표 끝 부분을 잡고서 고민했다.
'그냥 찢어 버릴까? 아님 잊어버렸다고 거짓말해 버릴까?'
그렇게 성적표를 내려다보며 주저하던 찰나, 유진은 문득 등줄기를 타고 스치는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누군가가 앞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감각이 든 것이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눈동자를 쌀짝 위로 들어 보았다. 확실했다. 멀지 않은 거리, 가로등 아래 아스레한 빛 너머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유진은 곧바로 고개를 홱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앞길에 놓여 있던 가로등 아래에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다.
보아하니 덩치는 그렇게 커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차림새였다. 유진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표정을 찡그리며 그 실루엣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딱 봐도 누추한 옷가지에 검은색 벙거지 모자... 그리고 긴 백발에다...
어? 설마.
순간 그녀의 몸은 바짝 얼어붙고야 말았다.
맞아, 틀림없어... 그 노숙자야!
유진은 문득, 오늘 떡볶이집에서 서영과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 그 노숙자 이야기 알지?" 서영이 물었다.
"어. 알아. 그게 왜?"
"우리 반에 어떤 애가 얼마 전 밤중에 그 사람을 봤데. 근데 걔도 똑같은 이야기 하더라. 그 소문이 진짜 사실인가 봐!"
그러자 유진은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야, 요즘 시대에 그런 일이 있을 수나 있겠어? 그리고 그 사람 학교 후문 쪽 골목길에선 말 한마디 안 하던데? 그냥 노숙자일 뿐이야."
평소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유진은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겨왔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가 진짜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밤중에, 사람들이 말했던 그 모습 그대로.
유진은 겁에 질리고 말았다. 성범죄자니 살인마니 하며 떠들던 그 이상한 소문들이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을 휘어잡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바로 뒤돌아 뛸 생각부터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도망쳐야 정상이었다. 어떻게든 뒤돌아 뛰고 싶었다. 하지만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그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았다. 유진은 몸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한편 그 노숙자는 가로등에 몸을 기댄 채로 유진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한 자세였다. 그는 정말로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일 것만 같은 묘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유진은 무언가에 홀린 듯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응시했다. 가로등 아래 흰 불빛을 감아 안은 그의 모습은 왜인지 모르게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유진은 그제야 사람들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인정했다.
'어... 어떡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숙자는 천천히 전봇대에서 등을 떼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바람결에 흩날리는 옷깃을 따라 서서히 유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급하지도 느릿하지도 않았다. 어느새 서너 걸음쯤 거리를 좁힌 그는, 마치 오래전 약속된 만남이라도 되는 듯 오른팔을 어깨 높이쯤 들어 올려 보였다. 고요 속에 작은 미소가 일렁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