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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2)

이상한 나라의 노숙자

by 사색가 연두

유진은 온몸이 달아오른 채로 거리를 내달렸다.


'사람들이 말하던 게 전부 다 사실이었어!'


헉… 헉…


유진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학교 앞 편의점 벤치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가쁜 숨을 고르며, 그녀는 아까의 일을 천천히 떠올려 보았다.


그 노숙자는 분명 손을 흔들며 무언가 말을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이 귀에 닿기도 전에, 그가 유진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발이 먼저 움직일 정도로 정신없이 거리를 내달렸다. 하마터면 큰 일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유진은 주위를 둘러본 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숨을 편히 고를 수 있었다. 선명하지 않고 흐릿하게 남아있는 장면의 연속극처럼, 현실보단 꿈속에 가까운 낯선 경험이었다.


호흡이 안정된 유진은 서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집까진 오래 걸리더라도 길을 조금 돌아서 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잘 됐다. 오늘만큼은 될 수 있는 대로 집에 늦게 들어가고 싶었던 그녀였다. 그때, 안정도 잠시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화면에는 엄마라는 두 글자가 떠 있었다. 망설이던 유진은 찰나의 고민 끝에 화면 속 버튼을 천천히 밀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왜 이리 늦게 오니? 지금이 몇 시야?" 휴대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소 흥분되어 있었다.


"지금 가고 있어요."


"오늘 모의고사 성적표 나오는 날이라며. 그런데 왜 전화를 안 하니? 성적은 어떻게 됐어

성적 얘기에 유진은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여보세요, 왜 말이 없어?"


"그게... 가서 보여드릴게요 그냥."


"그럼 빨리 와."


"네."


4월 중순, 유난히도 차게 부는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할퀴었다. 유진은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군 채 휴대폰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앞으로 다가올 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오늘은 정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어둠 속, 달은 반쯤 몸을 숨겼고 별은 어디에도 없었다. 차갑고 공허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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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리링-


현관문을 열고서 유진은 조심스레 집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신발장 안 희미한 전등빛이 차가운 타일 바닥 위로 퍼졌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거실로 향했다. 정적에 잠긴 공간만이 그녀를 맞이했다. 유진이 돌아올 시간 즈음이면 집은 언제나 이런 모습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유진은 숨 죽인 목소리로 인사했다. 곧바로 누군가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엄마가 안 방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성적표 줘 봐."


'잘 다녀왔니.' 그 짧은 인사 한마디조차 못 들어 본 지도 오래였다. 그래서일까, 이젠 딱히 서운하지도 않다.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이내 성적표를 달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곤, 틀림없이 엄마는 성대가 얼음으로 돼 있을 것이라 유진은 생각했다. 그녀는 군말 없이 가방 속에서 성적표를 꺼내 들었다. 방금 전, 노숙자를 피해 달아날 때 꼭 움켜쥐고 있었던 탓에 성적표는 엉망진창으로 구겨져 있었다. 엄마는 말없이 그것을 유진의 손에서 가로챘다.


"이건 왜 이렇게 구겨놨니?"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는 심장과 함께 그녀는 자연스레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아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유진의 성적표를 하나하나 감시하듯 꼼꼼히 훑어보았다.


"국어가 왜 이래?"


그녀는 두 눈에 칼을 쥔 채 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말없이 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다니는 국어 학원에만 한 달에 얼마가 드는 진 알고 있어? 어디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등급으로 성적표를 가져와!"


엄마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집 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유진은 문득 속이 들끓기 시작했다. 억울했다. 마치 모든 책임을 일방적으로 떠안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늘 그렇게 액수를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했다. 유진에게 쏟는 시간과 비용은 어디까지나 그녀에겐 일종의 투자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 투자는 오직 결과로만 증명되어야 하는, 단방향의 거래였다.


"다음번 모의고사도 이런 식이면 그냥 학원을 바꾸도록 해. 아니면 아예 과외를 붙이던가 해야지. 서영이도 이번에 1등급 받았다더라. 넌 도대체 이 성적으로 의대를 어떻게 가겠다는 거니 참... "


그녀는 끝까지 일정한 톤을 유지하며 공간의 숨통을 조여왔다.


"됐다. 들어가서 공부해."


사실 말은 늘 같았다. 마치 녹음기로 정해진 구절을 반복하는 것처럼.


실수도 곧 실력이야.

돈 들였으면 결과가 있어야지.

누구는 이번에 성적이 잘 나왔다더라.


유진은 이제 그런 말들에 고개를 끄덕이는 법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말없이 방으로 들어간 유진은 곧바로 문을 잠갔다. 억눌러 두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누구에게도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는 감각이 송곳처럼 가슴을 꿰뚫었다. 자신이 마치 세상의 가장자리에 버려진 외딴섬 아래, 끝없는 폭풍과 파도 속에 홀로 서 있는 다 무너져 내린 난파선 같았다. 그 위엔 불빛도, 손길도 닿지 않았다. 오직 차가운 바람만이 스쳐 갈 뿐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외로워 보였다. 유진은 침대에 몸을 던지듯 엎드려 베갯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아무도 모르게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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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유진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세면대 앞에 섰다. 잠결에 거울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붓기로 퉁퉁 부어 있는 얼굴이 거울 속에 떡하니 떠 있었다. 볼록 튀어나온 눈가는 조금만 쿡 찔러도 눈물샘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유진은 자신의 낯선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건 자존감이 짓눌려 내려앉은 초상이었다.


부엌으로 나오자 식탁 위에 엄마가 차려 놓은 아침밥이 보였다. 엄마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는, 그야말로 워커홀릭의 교과서였다. 치열한 일상 속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철저히 짜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였을까, 유진은 엄마 앞에선 그 어떠한 변명도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유진에게 무언가 잘못된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을 오롯이 딸에게 돌리곤 했다. 늘 그래왔다. 자신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그런 엄마가 답답하면서도 유진은 그녀를 이해하려 애썼다.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 구나.

내가 좀 더 열심히 했어야 했구나.

그냥 다... 핑계일 뿐이구나.


엄마의 삶을 떠올릴 때면,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불가피했을지도 몰랐다.


유진은 식탁 앞에 가 앉았다. 하지만 젓가락을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엄마가 차려놓은 음식이어서 먹기 싫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밥맛이 없을 뿐이었다. 속에 무언가가 꽉 차 있는 듯 거북했다. 그녀는 결국 젓가락을 들지 않고 몸을 일으켜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그렇게 찬 물로 대충 머리를 감고 양치를 한 뒤, 방으로 들어가 교복으로 갈아입고 책가방을 챙겼다. 휴대폰을 켜 보니, 시간은 오전 7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등교 시간까진 꽤나 여유가 있는 시간대였다. 하지만 유진은 집 안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4월의 바람이 그녀를 맞이했다. 그 순간, 바로 학교로 가기보단 문득 이곳저곳 떠돌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어디든 괜찮았다. 유진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일단 시내로 이어지는 길목을 향해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빵빵!!


출근하기 위해 오고 가는 차들과 사람들로 붐비는 카페, 신호등은 쉴 새 없이 색을 바꾸고 버스 안엔 졸린 눈이 가득했다. 화려한 건물들 사이로 핏줄처럼 이어진 도로는 마치 하나의 살아있는 거대한 공장과 같았다. 유진은 백상아리를 떠올렸다.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는, 그런 곳이 바로 여기, 서울이었다.


시내로 나오자 유진은 또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그러자 불현듯 떠오른 장소가 하나 생겼다. 금호 고등학교 뒤편에 있는 작은 뒷산. 유진은 천천히 생각을 되짚어 그곳을 기억해 보았다. 그 뒷산을 조금 오르다 보면 분명 작은 공원 하나가 나왔다. 어렸을 적엔 친구들과 자주 놀러 가던 곳이었지만, 언젠가부터 시간이 조용히 먼지를 덮어 씌우듯 그녀는 그 장소를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곳을 방치해 둔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을까. 당시에 그곳에서 학생 한 명이 자살을 한 뒤로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말았다. 자연스레 공원은 차츰 버려졌고, 이젠 스산하고 휑한 기운만이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때문에 지금은 여러 괴담의 무대가 되었다. 그 노숙자가 사람을 잡아다 끌고 간다는 장소도 바로 그곳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유진은 어쩐지 그 공원에 꼭 가봐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딘가에 끌리듯 마음이 계속 그쪽으로 향하라며 기울었다. 그녀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곧장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등교 생각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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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 입구로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 계단 위로 나뭇잎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여긴 아직 그대로 구나."


그로부터 십 분쯤 계단을 오르자, 고개 위로 서서히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어버린 장소의 얼굴이 드러났다. 한때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곳이, 지금은 바람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녹슨 운동기구와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 비록 죽어가는 장소이긴 해도 사람들의 관심 밖에 난 장소는 저마다의 아름다움 또한 품고 있는 법이었다. 그녀는 다 쓰러져 가는 벤치에 앉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도시의 소음도, 엄마의 잔소리도, 성적에 대한 불안도, 이곳까지는 따라오지 못하는 듯했다. 조용한 바람이 꽃가루를 선물했다. 유진은 잠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스락- 바스락-


그때, 누군가 낙엽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은 귀를 간지럽히는 그 소리가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어쩐지 그 발소리가 점점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리가 점점 뚜렷해지자 유진은 눈을 뜨고서 고개를 돌렸다. 벤치 건너편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그의 실루엣을 살펴보자, 유진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백발... 벙거지... 푸른 눈.

뭐야. 저 사람이 왜 여기에?


두려움보다는 기시감이 먼저 몰려왔다. 그 노숙자는 마치 이 모든 조우가 예정되어 있었다는 듯, 나무 아래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내 유진이 자신을 알아챈 것 같자 나무 그늘을 벗어나 서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눈빛에 칼날을 세우며 경계했다. 아무리 아침 시간대라고 해도 혹시나 몰랐다. 그가 어떤 사람일지. 그러자 그는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넸다.


"또 만났네. 키치."


"저를 아세요?"


"그 이름 맘에 들지 않아? 겉으론 멀쩡한데 속은 온통 부서진 아이."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유진은 당혹스러웠다. 역시 이상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얼른 일어나 자리를 뜰 채비를 했다.


"너 어제 울었지?" 그가 불쑥 물었다.


유진은 잠시 동작을 멈춰 세웠다. 정곡을 찔렸다. 어젯밤, 배겟잎을 적실만큼 울었던 일이 다시 머릿속에 그려지고 말았다. 시선 너머로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유진은 고개를 돌려 노숙자를 노려보았다.


"얼굴에 딱 쓰여 있구만. 나 어제 실컷 울었어요~ 하고." 그가 입술을 아래로 축 내리며 비꼬는 듯 말했다.


유진은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다시 그를 향해 시선을 되돌렸다.


"아저씨가 무슨 상관인데요?"


"음... 아무 상관도 없긴 하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느긋하게 다가오더니,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키치들은 늘 그렇게 혼자 서서히 무너지거든."


그가 가까이 오자 유진은 이상하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젯밤과 똑같았다. 마치 무언가에 붙잡힌 듯 발끝부터 시선까지 얼어붙고 말았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주목시키는 힘. 그것이 그에겐 왠지 오래전부터 자연스레 몸에 스며든 향기처럼 배어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 속 고요한 적막, 깊고 바다 같은 시선, 나비처럼 날아와 조용히 귓가에 내려앉는 듯한 목소리. 동시에 그의 얼굴 어딘가엔 슬픔이 담겨 있는 듯 아련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건 오래된 비밀 같기도, 잊힌 이야기 같기도 했다.


"도대체 요... 용건이 뭐죠? 왜 자꾸 저한테 다가오시는 거예요?"


"너도 네가 무슨 마음인지 잘 모르겠지?"


그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근데 정말로 네가 슬퍼서 운 게 맞을까?"


여전히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그였다. 유진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전 이만 가볼게요."


"사람들은 다 자기 속 안에 작은 키치가 있어. 키치는 무너지기만 하는 게 아니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치지."


따악-!


그때, 어떤 소리와 함께 봄바람이 꽃가루와 춤을 추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놓고 스쳐갔다.


바스락- 바스락-


나뭇잎이 흔들거리는 소리가 그들의 침묵을 대신해서 채웠다. 유진은 잠시 꿈속에 발을 들인 듯했다. 지금 이 순간이 비현실적이면서도 묘하게 익숙했다. 그러자 그가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오늘 밤, 여기서 다시 보자. 좋은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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