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않은 꿈은
때는 작년 겨울, 하늘의 금호고등학교 탁구부 입단 테스트가 있던 날. 그는 일을 끝마치고서 기쁜 소식에 가슴이 부풀어 올라 부리나케 퇴근길에 올랐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던 중, 그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는 온통 하얗게 물들었고, 마치 자기 딸을 축하해 주기 위해 세상이 함께 축제를 열어주는 듯했다. 그렇게 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하던 그때, 졸음운전을 하던 트럭 한 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의 삶을 앗아가 버렸다.
하늘은 소식을 듣자마자 입단에 성공했다는 기쁨도 잠시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헉... 헉...
"여보오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들려왔던 건 엄마의 절망 섞인 울음이었다. 눈 대신 하얀 천으로 덮인 시신. 엄마는 그 하얀 천을 붙잡으며 왜 저렇게나 처절하게 울고 있는지, 하늘은 머릿속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반응하고 있었다. 손발이 떨려왔다. 눈에 초점이 흔들렸다. 천장이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이거 놔! 우리 애 아빠 살려내!!"
'아니 엄마.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빠가 죽을 리가 없잖아.'
저게 아빠일 리가 없었다. 하늘은 애써 그렇게 단정하려 했다. 지금쯤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자신에게 달려와 합격을 축하해 줘야 마땅했다. 얼른 감싸 안아주며 우리 딸 장하다는 말을 해줘야 했다.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그러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술렁임과 급박한 발걸음 소리, 그리고 공기를 짓누르는 이상한 정적이 하늘의 가슴을 서서히 파고들었다. 어느새 발끝에서부터 얼어붙는 듯한 공포심이 숨통을 조여왔다. 하늘은 저항하듯 고개를 돌리고서 하얀 천이 덮여 있는 그곳으로 향했다.
"아빠?"
속으로 중얼거리며 부정하려 했지만, 심장은 점점 빨라져 마치 가슴을 찢고 나올 듯 쿵쾅거렸다. 천을 만지는 손끝은 부들부들 떨어댔고, 순간 다리는 제 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한 채 휘청였다. 믿고 싶지 않았으나 현실을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세상은 너무도 잔혹하게 진실을 들이밀고 있었다.
어느새 창 밖의 눈은 칼바람을 타고 더욱 거세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삑-! 폭설 주의보 발령.
하늘은 눈을 좋아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선 아빠와 함께 맞던 눈은 언제나 따뜻했다. 이번 연도 첫눈이 오면 꼭 같이 보자고 해 놓고선,
"오늘 첫눈이 온데! 우리 하늘이 입단에 성공하면 눈 맞으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가 처음으로 딸과의 약속을 저버린 날이 되었다. 차가웠다.
저벅저벅
털썩
"노을이 참 이쁘지?"
"아 깜짝아."
"뭐야. 너 울어?"
"아... 아니거든요?"
하늘이 노을을 보며 생각에 잠길 동안, 어느새 그는 하늘의 옆 그네에 올라타 앉아 있었다. 그녀는 헐레벌떡 눈물을 닦아냈다. 몰래 훔친다는 눈물을 본의 아니게 들켜버렸다.
"아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죠!" 하늘은 부끄러움을 숨기려 괜히 투정을 부렸다.
"나를 반겨줘야 인사를 할 맛이 날 거 아니냐. 그래도 난 네가 여기 올 줄 알았어."
"몰라요. 지금 기분 안 좋아요."
"딱 보니 외로워서 울었구먼."
하늘은 그를 노려보았다. 속으론 어떻게 맞췄는지 궁금했지만, 그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대고는 노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순간, 그의 옆모습에 그을린 빛과 그림자가 더 해졌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하늘은 더 이상 그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도 편안했다. 코끝이 시큰해진 하늘은 훌쩍 숨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저 여기 왜 부르셨는데요."
"아 맞다. 줄 게 있어서."
그러자 그는 외투 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이내 천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늘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뭔데요?"
"풀어 봐."
천주머니를 풀자 그 안엔 작은 손거울 하나가 들어있었다. 조금 오래되어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촌스러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걸 왜 주는 거예요?"
"키치. 네가 우는 이유가 뭘까?"
"네? 그야 슬퍼서겠죠."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보면 네 속엔 수많은 표정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하늘은 가만히 손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키치는 탁구 선수가 꿈인가?"
"그렇긴 한데 제가 앞으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젠 확신이 서질 않아요."
"사실 모두가 다 그래.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거든. 근데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것에 대해 알려고 들어. 캄캄하니까 안 보이는 게 당연한 건데도 말이야. 그렇게 확신을 바라고 누군가가 정답을 알려주길 바라지. 근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야. 선생님도, 부모님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음... 그래서요?"
"그럼에도 선택은 너에게 달려있다는 거지. 너는 필연을 믿어?"
"글쎄요. 전 안 믿어요."
"맞아. 세상은 우연으로만 가득하지. 다만 알게 모르게 우리는 거기에다 의미를 더 해.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다 키치일 수밖에 없는 거야. 필연이란 건 따로 없어. 네가 어쩌다가 탁구를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너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 모든 경험과 과정은 너만 알고 너만 들고 있는 거야. 그러니 아무도 그걸 판단할 수 없어. 아직 깨지 않은 꿈은 그곳에 있는 거야. 그리고 꿈은...
깨라고 있는 거고."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그는 외투 안에 손을 짚어 넣고선 또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그것은 오래된 양장 노트였다.
"이것도 받아. 여기다가 오늘 하루 네가 느꼈던 감정들을 하나씩 쏟아내 보는 거야."
"글을 쓰라고요?"
"글 쓰는 거 좋아하니?"
"초등학교 때 이후로 일기도 안 써 봤어요."
"괜찮아. 하다 보면 별 거 아니야."
"좀 부끄러운데요."
그는 하늘을 향해 넌지시 웃음을 던졌다. 그 순간 노을에 비친 그의 얼굴에 그녀는 무수한 우주를 본 듯했다. 드넓은 바닷속 고요한 파도가 그녀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그때, 그는 앉아 있던 그네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말했다.
"저어기 하늘을 보도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었다. 한쪽에선 해가 점점 산 뒤로 몸을 숨겼고, 다른 한쪽에선 달이 서서히 차올라 하늘을 검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세상엔 영원한 건 없어. 태양이 영원히 하늘에 떠 있지 않듯, 달도 마찬가지지. 한쪽이 사라질 때 늘 다른 한쪽이 돋아나는 법이야. 근데 사람들은 늘 한 가지 색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믿지. 밝거나 어둡거나. 이기저나 지거나. 올라가거나 떨어지거나. 그런데 지금은 봐. 하늘은 둘 다 감싸 안고 있잖아. 삶이 다 그런 거야."
그들은 한참 동안 그네를 타며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달이 선명하게 차오를 시각이 되자, 하늘은 그간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근데 아저씨. 저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응?"
"키치가 뭐예요? 왜 저를 그렇게 부르는 거죠?"
"진짜 같은 가짜. 가짜 같은 진짜. 진짜와 가짜가 없는 진짜. 가짜와 진짜가 없는 가짜."
"에이. 그게 뭐예요."
"그 '뭐'가 아니라는 거지."
"역시 이상한 사람이 맞아." 하늘이 체념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자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런 그가 이상하면서도 동시에 일종의 동경심이 들었다.
"그럼 아저씨는 왜 이러고 다니는 거예요? 노숙자가 맞긴 해요?"
그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서 대답했다.
"하나만 물어보기로 했으니까, 끝!"
"쳇. 아! 근데 아까 오면서 우리 학교 선배를 봤어요. 이름이 뭐였더라? 어 맞아, 서해원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아저씨 아는 사람 맞죠!"
서해원. 그 이름이 들리자마자 그의 눈동자는.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 파장을 일으키듯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는 벙거지를 좀 더 깊게 눌러썼다. 해가 점점 기울어 산 너머로 몸을 숨기려던 참에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좀 더 깊게 드리웠다. 하늘은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살피고서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했음을 직감했다.
"어... 모르는 사람인가 보네요." 그녀가 조심스레 한 마디를 던졌다.
"내가 사랑하는 제자야."
"그렇구나."
하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름대로의 복잡한 사정이 있어 보였다. 아무래도 보통 사연은 아닌 듯했다.
"저 그럼 가끔 오고 싶을 때 와도 되죠? 여기 오면 매일 아저씨 볼 수 있는 거예요?" 하늘은 분위기를 바꿔보려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내가 항상 여기 있는 건 아니야. 그리고 가 봐야 할 때가 생긴 것 같아. 아마 당분간은 여기 없을지도 몰라."
"그럼 중간고사 끝나고! 그땐 꼭 와주세요. 저 5월 달이면 합숙도 해야 하고, 대회 준비도 해야 하고 좀 바빠서 시간이 많이 없단 말이에요."
"걱정 마. 아직 여길 떠날 생각은 없어."
그때, 하늘을 바라보던 그의 눈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 슬퍼 보였다. 그는 곧 하늘이 앉아 있던 옆 그네에 올라타 앉았다. 그리고 앞으로 손을 뻗고선,
따악-!
휘이이잉~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거센 바람이 불어와 하늘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뭇잎은 찰랑거리는 파도와 같이 흔들렸고, 하늘엔 새 때들이 날아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름다운 곡선 그림을 그렸다. 하늘은 그 순간 동화 속 어딘가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그녀의 얼굴엔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우와."
하늘은 날아다니는 새들을 바라보자 가슴속 무언가가 퍼뜩였다. 잠시나마 두려움도, 짐도, 어두운 그림자도 없었다. 오직 맑고 투명한 바람과 빛, 그리고 사랑이 온몸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양팔을 넓게 벌리고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이내 흡족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깊게 눌러놓았던 벙거지를 다시 슬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넌지시 말을 던졌다.
"너도 나도, 저 새들도 이 나무들도, 그리고 이 장소의 모든 것들도. 그저 찬란한 한 순간을 위해 살아갈 뿐이야. 그러니 사는 동안 무서울게 뭐 있겠어? 어쩌다 보니 우린 그냥 태어났고, 그러니까 그냥 한 번 살아보는 거야. 그냥."
"너는 이름이 뭐지?"
"이하늘이요."
"오늘 하늘이... 참 예쁘지?"
"우웩."
"다녀왔습니다."
"오늘 늦게까지 훈련했나 보네?" 엄마가 물었다.
"그러게 좀 늦었네."
"씻고 밥 먹어."
"응."
하늘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허기를 달랜 뒤, 방으로 들어가 그에게 받았던 공책과 거울을 꺼내었다. 공책을 책상 앞에 두고, 거울을 잠시 들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걸 깨달았다. 딱히 외모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라 그동안 무신경했던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는 것이 조금 어색했다. 거울을 들고서 자신의 얼굴을 훑어보는 행위 자체가 어딘가 낯설기도 하고 조금 부끄러웠다.
"내가 이렇게 못 생겼었나?"
괜히 자존감만 낮아졌다.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도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에 만족해하던 여자애들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문득 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곧 그녀는 거울을 옆으로 치워두고 양장 노트를 활짝 폈다. 그러자 헌 책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하늘은 잠시 그 냄새를 음미했다.
"스읍 하~ 냄새 좋다."
하늘은 펜을 들고 종이 위에다 손을 올렸다. 역시 쉽게 쓰이지 않았다. 사실 최근 들어 펜을 제대로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그녀였다.
"오늘 하루동안 들었던 감정을 적는다라..."
복잡하게 생각하니 머리가 더 지끈거려 왔다. 결국 깊이 생각하길 포기하고,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써보자고 그녀는 생각했다.
오랜만에 글을 쓰려니 글씨가 잘 써지지 않는다.
그래도 그냥 한 번 써 보려 한다. 계속 써 보면 조금은 늘겠지?
오늘은 토요일 주말 훈련을 했다. 근데 잘 집중을 하지 못했다.
감독님께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지 모른다.
갈수록 부담이 늘어만 난다.
성과는 나오지 않고, 정말 중요한 시기에 원치 않는 슬럼프가 온 것 같다.
왜 하필이면 지금일까...
우리 집은 형편이 그리 좋지 않다. 때문에 엄마는 나를 위해 온 힘을 쏟고 계신다.
미안하면서도 계속 원망하는 마음이 든다. 이런 내가 너무 싫다.
아빠가 너무 보고 싶다.
왜 나를 두고 먼저 그렇게 떠나신 걸까. 어쩔 수 없으면서도 세상이 밉다.
요새 자꾸 이상한 고양이를 만나는데, 그놈 덕분에 어쩌다 보니 공원에 가게 되었다.
어렸을 적 아빠와 자주 산책하러 갔던 곳이다.
오랜만에 가 보니 뭔가 뭉클했다. 그리고 괜히 슬펐다.
그곳에 가니 아빠가 더욱 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결국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오늘따라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저씨를 만나고 나서 왠지 모르게 후련한 마음도 들었다.
사실 최근 들어 탁구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근데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하늘은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결과물이 썩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이 가벼워져 뿌듯했다. 그녀는 노트를 덮고 곧바로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그러자 책상 옆에 세워둔 탁구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빠가 사주었던 탁구채였다. 손잡이엔 손때가 가득히 묻어있는, 수없이 많은 공을 쳤던 시간들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우리 딸. 나중에 멋진 탁구선수가 돼야지!"
그날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아빠의 목소리였다. 하늘은 오늘
꿈에서 아빠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