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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2)

기억 속 저편 공간으로

by 사색가 연두


"다녀왔습니다."


"왜 이리 늦게 와 인석아! 전화는 왜 또 안 받고!"


집으로 들어서자 풍겨오는 오래된 세월의 냄새.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밤새 눈뜨고 기다리던 엄마가 호통을 쳐댔다. 보통 10시가 되기 전에 잠을 청하는 엄마였다. 하지만 하늘이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자 그녀는 불안해서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일이 좀 있었어요."


"대회는? 어떻게 됐어."


"몰라요."


하늘의 집은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가득한 도시 변두리에 자리했다. 오래된 전등처럼 희미한 빛만 남은 공간. 재개발은 한없이 미뤄진 지 오래였다. 그 탓에 고개 너머 화려한 도심의 고층 빌딩과 이곳의 낡은 주택들은 서로 뒤섞여 기묘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서울 사람들에게 고층 빌딩과 아파트는 꿈이 아니라 제국이었다. 누군가에겐 쳐다보기도 힘든, 허영으로 이루어진 꿈의 제국. 학생들 사이에서도 서로 집을 묻는 일은 평수와 땅값을 재는 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때문에 예체능은 돈이 많은 집에서나 할 수있다는 인식은 하늘에겐 도전이자 치부이기도 했다.


오래된 연립 주택의 삼층. 현관문은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져 있고 집 안 벽면에는 곳곳에 누렇게 바랜 벽지로 도배되어 있는 방. 낡은 가구들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고, 상태가 온전한 것들은 거의 없다. 이런 녹록지 않은 가정형편 때문에 하늘은 자신이 탁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실은 부담이었다. 그래서 이번 대회는 어떻게든 성과를 내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성과는 커녕 되려 꿈에서 더 멀어지고 말았다.


"잘 안 됐니?"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하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엄마의 눈길을 등지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형편이 녹록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다며, 그래도 엄마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것쯤은 하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실이 미웠다. 세상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자꾸만 치밀어 올랐다. 하늘은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열심히 해 보자고, 용서하자고, 미워하지 말자고 되뇌어도 막상 엄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다.


하아-


하늘은 침대에 누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까전에 본 그 노숙자 생각이 났다. 그와의 만남은 잠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갔다 나온 듯 마치 꿈에서나 일어났던 일처럼 느껴졌다.


"내가 도대체 뭘 본 거지?" 하늘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꿈을 꾸고 깨지만 키치는 꿈을 잊어버리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그는 분명 학교 뒷산에 있는 공원으로 오라고 말했다. 하늘은 그곳을 잘 알고 있었다. 하늘이 어렸을 적에 아빠와 자주 가서 산책을 하곤 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중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작년,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나서부턴 아예 그곳을 쳐다보는 것조차도 싫어졌다. 하필이면 금호 고등학교 뒤편에 있으니 못 보고 지나칠 순 없는 노릇이지만, 그 산을 보기만 해도 하늘은 자꾸만 돌아가신 아빠가 아른거렸다.


"아빠가 저기 먼 별나라에서 별을 따다 엄마에게 선물해 줬거든? 그런데 엄마가 그 별이 마음에 들었나 봐. 그걸 열 달 동안이나 소중하게 꼬옥 안고 잤더니 짜잔~ 그 별이 하늘이가 됐네?."


누워 올려다본 천장엔 별 모양 스티커들이 반짝이며 붙어 있었다. 하늘은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마 하늘이 걸음마도 떼기 전, 아빠가 그녀를 위해 붙여 준 것일 터였다. 그 바래진 별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늘 그와 마주하면서 겪은 아름답고 신비한 광경들이 하나둘 머릿속에서 생생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공원이라...'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감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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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익-!


호루라기 소리가 자꾸 하늘의 귀를 때렸다.


"이하늘 정신 안 차릴래!"


후우 후우


다음 날 토요일 오후, 체육관은 선수들의 발소리와 탁구공이 튀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연습경기를 하는 중에도 하늘은 온전히 탁구공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중간중간 피어 나오는 딴생각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답답했다. 손목이 자꾸만 굳어 공의 각도를 조절하기가 까다로워 계속해서 실수를 반복했다. 수없이 쌓여만 가는 바닥에 떨어진 공, 네트에 걸린 공... 하늘은 결국 채를 집어던졌고, 감독님의 잔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야만 했다.


끼익- 끼익-


그럼에도 체육관 바닥을 긁는 운동화의 마찰음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모두가 그칠 줄 모르는 릴레이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쏟아져 나오는 탁구공을 힘껏 쳐냈다. 하늘 또한 땀방울이 온몸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로 유니폼을 적셨다.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파왔고 발바닥은 마치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삐익-!


감독님이 세차게 호루라기를 불렀고, 선수들은 그제야 훈련을 마칠 수 있었다. 창밖을 보니 하늘이 붉게 물든 것으로 보아 어느새 해가 저물 시각이 된 듯했다. 선수들은 일제히 줄을 맞추어 정렬을 이뤘고, 곧이어 감독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한 달 뒤에 또 선발 과정을 치를 거야. 너네는 늘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돼. 어쩔 수 없어. 세상이 그래. 지금 너희들한텐 잠깐의 슬럼프도 치명적일 수 있다고. 내일은 푹 쉬고, 이제 곧 중간고사인가?"


"넵!"


"중간고사 끝나고 5월엔 또 합숙 훈련이 있을 예정이니까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라."


"넵!"


"그럼 오늘 가서 푹 쉬고 월요일날 보자. 이상!"


이번에도 감독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무섭게 선수들은 짐을 챙기고 체육관을 나섰다. 그런데 하늘은 좀처럼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체육관 한가운데 서서 생각에 잠겼다.


"하늘! 거기서 뭐 해? 집에 안 가?" 동료 중 한 명이 멍하니 서 있던 하늘에게 물었다.


"어? 아.. 나 좀 볼일이 있어서."


"뭐야, 설마 혼자서 더 연습하려고?"


"어... 응."


"이열~ 멋진데? 그래 수고해!"


다른 동료들이 모두 시야 밖으로 나갈 때까지 하늘은 체육관에 남아 있었다. 혼자서 연습을 더 하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저 뒷산에 갈지 말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어젯밤부터 틈만 나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그 노숙자의 얼굴... 하지만 하필이면 장소가 그 공원이라는 점이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하늘의 시선은 체육관 구석구석을 맴돌았고, 발걸음은 계속 망설임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그러니 내일 꼭 와. 아직 잠들지 않은 꿈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그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귓가에 울렸다. 왠지 그와의 만남엔 뭔가 특별한 조짐이 있을 것만 같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우연성. 인간에겐 그런 낭만성이 마음속 어딘가엔 조금이라도 깃들어 있는 법이었다. 그때였다.


덜컥 덜컥


하늘은 본능적으로 어젯밤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와 비슷한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였다. 이번엔 재빠르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역시나 창문에 비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하늘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런 기척 또한 느낄 수 없었다. 휑하게 놓여있는 운동장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하늘은 머리를 긁적이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창문을 닫으려던 찰나였다.


카악!!


"엇!"


쾅!


또 당하고 말았다. 심지어 이번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하늘의 시선에 비친 건 어젯밤에 보았던 그 고양이었다. 물론 어제는 도망치느라 녀석의 모습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눈동자를 보니 푸른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의 눈동자를 보자 어제 그 고양이가 틀림없을 것이라 그녀는 확신했다. 하늘은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왠지 이놈이 일부러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씨. 너 거기 딱 기다려!"


하늘은 당장 체육관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열었던 창문 쪽으로 돌아나오니, 녀석은 꼬리를 흔들며 잡을 수 있으면 한 번 잡아보라는 듯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은 주먹을 불끈 쥔 채 녀석이 있는 쪽으로 전력을 다해 뛰었다. 그러자 녀석은 일부러 잡힐 듯 말듯한 속도로 하늘을 조롱하듯 뛰었다. 심지어 달리다가도 하늘이 조금 지칠 기미가 보일 때면, 잠시 멈춰 서선 그녀가 따라오길 기다려주는 여유까지 부리기도 했다. 끝내 하늘은 지치고 말았고, 두 손을 무릎에 댄 채 바닥을 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녀석은 그런 하늘의 모습이 우스웠던지 엉덩이를 추켜올린 채 꼬리로 원을 그리며 울어댔다.


"진짜 웃긴 놈일세. 내가 오늘 훈련량만 많지 않았어도 넌 금방 잡았어."


그 순간 하늘의 시야에 뒷산 입구가 불현듯 들어왔다. 정신없이 고양이만 보며 뛰어다니느라 그동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 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굽혔던 허리를 피곤 산의 입구로 들어서는 오래된 나무 계단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어렸을 적 아빠와 자주 오르내리던 곳. 오랜만에 마주한 공간의 풍경은 하늘의 여러 추억들을 몽글몽글 피워 올렸다.


"이게 우연일 리가."




고양이는 나무 계단 위로 올라가 하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왠지 저 고양이가 자신을 일부러 이곳으로 이끈 것만 같았다. 마치 자기가 이곳의 주인이라도 된 양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꼴사납게만 느껴졌지만,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계단 위로 발걸음을 올렸다.


끼익- 끼익-


계단을 오를 때마다 들려오는 오래된 나무의 신음소리와 함께 하늘은 주위를 천천히 살펴보며 걸었다. 변한 것이라곤 좀 더 무성하게 뻗은 풀과 나무들 뿐이었다. 예전에는 평일에도 이 시간대면 나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많이 마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변에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 낮설면서도 익숙한 공간의 모습에 하늘은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안녕?"


하늘은 순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 분명히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체 모를 여학생이 그녀 옆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하늘에게 물었다.


"너 선생님 만나러 가니?"


"네?"


하늘이 당황하는 표정을 보이자 그녀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복을 보아하니 같은 금호 고등학교 학생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반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하늘은 그녀가 자신의 학교 선배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명찰의 테두리 색깔을 슬쩍 흘겨보았더니 하얀색, 고삼을 상징하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거기엔 '서해원'이라는 이름 석자가 쓰여 있었다.


"반응을 보니 너 선생님을 만난 지 얼마 안 됐나 보구나?"


"선생님이요?"


"뭐, 곧 알게 될 거야. 그나저나 너 탁구부야? 멋있다! 선생님이 꽤 좋아하시겠는 걸."


갑작스런 상황에 현실감각이 없어진 하늘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분위기가 묘하게 심상치 않았다. 나풀나풀 가벼워 보이는 몸과는 달리, 두 눈 속 갈색빛을 띠는 눈가는 고요한 유리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괜찮아. 우리 선생님 좋은 분이셔. 그러니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돼. 아마 좋은 가르침을 주실 거야."


하늘은 그제야 그녀가 말하는 선생님이란 사람이 혹시 그 노숙자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란 직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확실히 그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었다.


"저 혹시 그럼..."


"난 이제 가 볼게. 언제 한 번 또 보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네. 안녕!"


하늘이 질문을 하려던 찰나, 그녀는 곧장 말을 끊어내고는 손을 흔들며 재빨리 아래로 내려갔다. 하늘은 멍하니 멀어져가는 그녀를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어딘가 차갑고 쓸쓸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도 딱히 그녀를 마주친 적은 없었다. 학년도 다르거니와 하늘은 남들처럼 교내 생활을 할 수도 없었기에 아무래도 당연했다. 하늘은 곧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어?"


생각해 보니 고양이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는 걸 그제서야 눈치챘다. 이곳에 온 뒤로 하늘은 자신도 모르게 녀석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게 십여분쯤 지나자 오래된 기억 속에 숨겨놓았던 공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원에 들어서자 하늘은 속으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곳의 풍경은 어렸을 적 기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물론 관리를 안 한 탓에 기구들은 녹슬어 더 이상 쓰지 못할 정도로 부식되어 있었고, 흙바닥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긴 했다. 하지만 기구들의 위치나 공원의 전체적인 구조는 여전했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공원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다. 그러자 또 아빠 생각에 괜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빠가 밀어주던 그네, 아빠에게 업혀 매달렸던 철봉, 아빠가 건네주던 약수터의 물. 그 외에도 이곳에 놓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저마다의 사진을 품고 있었다.


"아빠..."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녀에겐 기댈 곳이 필요했다. 엄마에게 기대기엔 그저 미안하기만 했다. 엄마는 아빠가 죽은 뒤, 홀로 모든 것을 책임지게 되었다. 아마 그녀도 많이 외롭고 힘들 것이었다. 또한 어릴 때부터 선수생활을 해 온 탓에 마음 터 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같이 선수 생활을 하는 동료들이 있지만, 그들은 동시에 하늘의 경쟁상대이기도 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엔 항상 미묘한 긴장감과 불편함이 있기 마련이었다.


어느새 노을 진 빛이 공원을 선명히 드러내었다. 하늘은 벤치에서 일어나 그네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서 오른쪽 그네에 털썩 걸터앉았다. 누군가의 손길이 그녀의 등을 밀어주었으면 했다. 하늘은 그 손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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