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게요, 오늘 밤에
"아! 그런데 오면서 다른 친구를 봤어요."
유진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조금 전 공원으로 올라오는 길에서 마주친 그 여자아이. 그녀는 노숙자 아저씨를 더러 선생님이라고 말했으니, 그도 분명 그녀를 알고 있을 터였다. 유진은 차마 그 이야기를 묻지 않고 넘어갈 순 없었다.
"그... 명찰에 서해원이라고 쓰여 있었나? 하여튼 저랑 같은 금호고 교복에다 심지어 같은 학년이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도 아저씨를 아는 것 같던데요? 막 선생님이라 부르던데."
순간 유진을 마주 본 그의 눈동자가 푸르게 번쩍였다. 어딘가 놀란 기색이 여력 했다. 그 찰나의 감정이 고스란히 눈에 스며들자, 유진은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했다는 걸 직감했다. 몇 초간의 어색한 기류가 그들을 침묵으로 이끌었고, 그는 이내 고개를 떨구곤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너도 봤나 보구나."
"누군지 아세요?"
"그럼... 잘 알지."
힘없이 내뱉은 그의 목소리엔 어딘가 무거운 사연이 깃들어 보였다. 유진은 여기서 더 깊게 캐묻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는 곧 그네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다.
"이제 집 가야지. 늦겠다."
"저... 지금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안 돼. 어머니 걱정하실라."
"우리 엄만 그런 거 안 해요. 그리고 스터디 카페에서 좀 오래 있었다고 하면 돼요."
"절대. 얼른 집에 들어가."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유진은 오기 부리며 대응했다.
"그럼 저 내일 또 여기 올래요."
"당분간은 여기에 없을 거야."
"네? 왜요?"
"가봐야 할 곳이 생겨서 그래."
"저 곧 중간고사라 다음 주부터 시험 끝나기 전까진 여기 못 올지도 몰라요."
"그럼 시험 끝나고 보면 되겠네. 만남이라는 건 본래 우연에 기반을 두는 거야. 그래서 아름다운 거고."
그는 빙그레 웃으며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 웃음을 보자, 유진은 이제 완전히 그에게 마음을 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를 당분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물론 아쉬웠지만, 유진에겐 이번 중간고사 또한 무척 중요했다.
"키치는 이름이 뭐지?"
"정유진이요."
"유진. 이름 예쁘네."
"그런가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분명 이쁜 이름이야. 그리고 난 아직 여길 떠날 생각은 없으니 너무 걱정마. 너 말고도 이곳엔 여전히 많은 키치들이 있으니까."
"그럼 시험이 끝난 다음에 오면, 그땐 여기에 있어 주실 거죠?"
유진이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럼."
띵동~ 띵동~
해가 중천에 걸린 시각, 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교실 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어느새 4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고3의 교실은 여전히 아늑하면서도 그 안엔 긴장감과 불안함이 고요하게 스며있었다. 감독 교사가 시험지를 걷어갈 때마다 들리는 종잇장 부스럭거림은 마치 그들의 심장을 사각사각 긁어대는 소리 같았다.
"자, 다들 고생 많았다. 시험 결과는 아마 5월 첫째 주쯤 나올 거야. 내신 관리도 중요하니까 수행평가 대충 하지 말고 제대로 준비해라."
고3에게 쉬는 시간이란 사치였다. 중간과 기말고사도 모자라 수행평가와 학생부를 채우기 위한 갖가지 활동들, 거기에 모의고사까지. 여기서 하나라도 삐끗하면 원하는 대학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유진은 이 모든 것을 빠짐없이 우수하고 성실하게 해내야만 했다. 만들어가는 인간이 아닌, 오로지 만들어지는 인간으로서.
종례가 끝나자, 유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로부터 며칠쯤 지났을까. 사실 유진은 그를 만나기 위해 두세 번쯤 뒷산에 올라간 적이 있다. 하지만 그곳엔 언제나 적막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금호고 후문 뒷골목에서도 그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이를 두고 학생들 사이에선 어느새 또다시 근거 없는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 그가 사실은 유령이었다거나, 산신령이라거나, 심지어는 경찰에 붙잡혀 감옥에 갔다는 소문까지도 돌았다. 하지만 그 어느 말도 유진의 마음엔 와닿지 않았다. 그는 분명 떠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유진은 그의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 시험 끝났는데...'
유진은 그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엔 그녀도 중간고사를 준비해야 했기에 여유가 없었다. 평일엔 온통 학업 스케줄로만 가득 차 있었고, 주말마저 학원에 묶여 있었다. 그 때문에 자연스레 뒷산에 오르는 발걸음도 뜸해졌다. 하지만 그가 준 공책과 거울은 여전히 그녀의 책가방 속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단 하루도 빠짐없이, 유진은 공책 위에 몇 줄씩이라도 글을 적어 내려갔다. 만일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제는 그녀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진아~!"
뒤를 돌아보니 언제나 그렇듯 서영이가 다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시험 끝이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유진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오~ 정유진 웃는 거 보니까 시험 꽤 잘 쳤나 봐?"
"음... 글쎼? 그냥 왠지 홀가분해서. 조금 성적이 안 나오더라도 이젠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서영은 놀란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항상 시험 친 날엔 걱정으로만 가득했던 유진의 얼굴이 오늘은 유난히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서영은 그런 유진을 보자 괜히 뿌듯해졌다.
"어머 어머, 정유진이 웬일이래. 확실히 그 아저씨 만난 뒤로 뭔가 달라졌단 말이지."
"그냥... 인생엔 정말 정답이 없는 것 같더라고. 그러니까 우린 계속해서 방황하게 되는 거고."
"얼씨구? 글 쓰더니 아주 문학소녀 다 됐어. 근데 그 아저씨 못 본 지는 꽤 오래됐지 않아?"
"응. 근데 괜찮아. 이제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서영은 걷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말했다.
"좋아! 오늘 떡볶이 먹으러 간 다음 노래방 어때? 그리고 간만에 영화도 보러 가는 거야!"
서영은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유진은 그런 서영을 보며 말했다.
"그래!"
5월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 유진이 등굣길에 학교 후문 쪽 골목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떤 남학생 한 명과 고양이 한 마리가 좁은 골목을 가로지르며 추격전을 펼치고 있는 게 아닌가. 고양이는 입에 편지 봉투처럼 생긴 무언가를 물고 있었고, 남학생은 숨을 몰아쉬며 그 뒤를 쫓고 있었다. 유진은 생소한 광경에 그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그 고양이가 어딘가 굉장히 낯이 익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리가 조금 가까워지자 검은 털에 푸른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그 녀석이었다.
남학생은 결국엔 체력이 떨어졌는지 숨을 몰아쉬며 유진 앞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헉... 헉... 아 미치겠네. 저거 뭐야 도대체?"
그가 쫓고 있던 고양이는 어느새 골목 너머로 사라졌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유진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가로등 아래...!'
그러다가 문득 번뜩이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갔다. 곧바로 유진은 그가 항상 앉아 있곤 했던 골목길 가로등 아래로 달려갔다.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그녀의 발끝을 이끌었다. 우연, 그것은 어쩌면 작은 확률의 총합으로 이뤄진 일종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유진은 왠지 오늘은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곳에 도착하자 아쉽게도 노숙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탁구복을 입은 한 여학생이 그곳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보아하니 금호고 탁구부 학생인 것 같았다. 유진은 숨을 고르기도 전에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 뭐 하나만 물어볼게. 혹시 어떤 노숙자가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니? 머리는 하얗고 길이는 조금 길어. 눈동자는 푸르고!"
"저도 보진 못했는데, 아마 다시 온 것 같아요."
"응?"
"하... 참. 사람 이렇게 기다리게 해 놓고 어디서 뭘 하다 이제 온 거야?"
유진은 그녀의 말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마치 저 아이도 무언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자 유진은 곧바로 탁구부 소녀에게 물었다.
"너 혹시 그 사람 알아?"
"에... 아뇨! 잘 몰라요. 절대 뭐 그런 거 없어요...!"
탁구부 소녀는 당황한 기색이 여력 하게 황급히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역시 어딘가 수상했다. 유진이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말했다.
"그... 근데 여기! 방금 어떤 검은색 고양이가 이걸 여기다 두고 가긴 했어요. 뭔진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손엔 편지 봉투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봉투 속에 든 편지를 꺼내어 유진에게 건네주었고, 유진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종이 위에는 곱고 단정한 글씨체로 단 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달 뜨는 밤, 우연이 필연이 되도록.'
그 순간, 종이 위에 적힌 짧은 문장을 감싸듯 꽃잎 하나가 살랑이며 내려앉았다. 유진은 틀림없이 이 편지가 그의 손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져 올랐다. 이미 다 지나간 봄빛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다시 피어올랐다. 부드럽게 부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머금었다. 그녀는 조용히 입으로 속삭였다.
"갈게요...!"
"오랜만이네."
한적한 분위기의 어느 납골당. 세상의 소음을 잠시 바깥에 두고서 그는 깊은 적막 속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늘 그랬듯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반겨주었다.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한다며, 시간이 지나도 색만 바래질 뿐, 여전한 그녀의 모습에 그는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조용히 가슴 안에 담겨있던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세상 가장 깊숙한 자리에다 그것을 놓았다.
"당신이 누구라고 여길 들어와! 당장 꺼져!"
"살인마 x끼."
그날의 목소리들은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그의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당시의 원망과 분노, 그들의 눈빛과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살아가면서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잊어선 안 될 기억들도 있는 법.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평생 안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며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억울하고 괴로웠다. 어쩔 수 없었다.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그 속에서 인간들 또한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오해가 큰 실수로 번지는 일은 결코 제 힘으론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요새 다시 산으로 오는 것 같더구나. 어때 내 학생들?"
그녀는 여전히 말없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나...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그가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해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