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유진(4)

달이 선명할 땐

by 사색가 연두

"정유진, 이리 와봐."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엄마는 냉랭한 분위기를 감싼 채 부엌 식탁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높아져 있었다. 오늘 유진이 학원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마 학원 측으로부터 전해 들은 듯했다.


"너 요새 뭐 하고 다니니? 오늘은 또 학교에 지각까지 했다며? 늦잠 잔 거니?"


유진은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학교엔 산책하느라 늦게 갔고요... 학원은 어느 노숙자 만나러 가느라 빠졌어요... 그녀 스스로가 생각해 봤을 때도 어이가 없는 이유였다. 그러자 왠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학교야 한 번쯤 지각할 수 있다 쳐. 그런데 학원은 도대체 왜 말도 없이 빠진 거니? 이 시간까지 도대체 어딜 돌아다니다 이제 온 거야!"


"오늘은... 그냥 좀 쉬고 싶었어요."


"뭐?"


엄마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시간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는 걸 유진은 깨달았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 시계를 보니, 시곗바늘은 오후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유진. 너 갑자기 왜 이래? 이번 모의고사에서 그따위 성적을 받았으면 더욱 치열하게 공부해도 모자를 판국에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아무런 말도 없이 몰래 학원을 빠지니? 네가 애야? 그리고 쉬고 싶다고? 도대체 어디서 뭘 한 거니?"


엄마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해요."


유진은 고개를 떨군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할 뿐이었다.


두통이 온 듯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길게 내쉬는 엄마를 보며, 유진은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다. 물론 엄마에게 혼날 거란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하루, 딱 하루정도만 쉬었을 뿐인데 이렇게나 혼이 나다니. 그녀는 당장이라도 방으로 달려가 문을 굳게 잠가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엄마의 잔소리를 더는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들어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 말이 들려오자마자, 유진은 말없이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같았으면 또 혼자 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울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물론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 왠지 오늘의 일탈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만 같았다. 특히나 노숙자 아저씨와의 만남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여운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진은 책상 앞에 앉아 책가방을 열었다. 그에게 받았던 양장 노트가 눈에 띄었다. 유진은 노트를 꺼내어 폈다. 구수한 헌 책 냄새가 그녀의 코를 간지럽혔다.


흐음~ 하~


유진은 노트를 코끝에 가까이 대고서 하얀 백지 위로 은은히 배어 나오는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낡은 종이에서 풍기는 향은 마법처럼 그녀의 마음을 확 가라앉혔다. 그러고 나서 유진은 그에게 받았던 손거울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색하지만 살짝, 아주 살짝 미소를 머금어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크게 웃어본 적이 언제였더라?' 아무리 떠올려 봐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잠시 후, 유진은 살며시 거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짐하듯 책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펜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짚기 시작했다.




"키치는 글 쓰는 거 좋아하나?"


"딱히 좋아하진 않아요."


"근데 이젠 좋아하게 될 거야. 집에 들어가서 오늘 하루 네가 느꼈던 감정을 여기에다 솔직하게 다 꺼내 봐. 그리고 내일 오후, 이쯤에 여기서 다시 만나는 거다."


"... 근데 왜 자꾸 만나려 하시는 거죠?"


"네가 약속했잖아?"


"네...? 제가 언제 그랬어요."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 소리치던데? 괜찮아, 잠깐이면 돼. 그리고 어차피 넌 여기 다시 오게 돼 있어."


유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잠깐 흘겨보곤 다시 공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영은 여전히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나두 갖고 싶다..." 서영이 말했다.


"키치는 다음에 때가 되면 줄게."


"그때가 언젠데요..."


"나야 모르지. 그리고 안 오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아저씨, 근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왜 우리를 키치라고 부르는 거예요? 키치가 뭐죠?"


그가 몸을 일으킨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 다들 일어나 봐. 저기 떠 있는 달 보여?"


순간 유진과 서영은 당황해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둘 다 천천히 그네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다. 하늘엔 달이 아주 크게 떠 있었다. 손만 뻗으면 잡힐 듯, 숨만 내쉬면 닿을 듯이 가까운 그런 달이었다.


"달의 바다와 육지가 선명하게 보이지? 마찬가지로 모두에게나 밝은 면이 있듯 어두운 면도 있기 마련이야. 달은 네가 외면했던 얼굴을 가장 조용하게 비추지. 근데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거든. 심지어 어떨 땐 얼굴을 숨기기도 해. 따지고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그래. 그러니까 우린 모두 키치일 수밖에 없는 거야. 하지만 저렇게 밝음과 어두움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활짝 보여줄 때, 그때만큼은 그 대상을 진정으로 들여다봐 줘야 해. 그게 너 자신이든, 그 누군가이든."







유진은 그와의 대화를 떠올린 뒤 펜을 들긴 했으나, 막상 종이를 앞에 두고 보니 글이 좀처럼 떠오르질 않았다. 항상 감정을 드러내기보단 숨기기 바쁜 그녀였다. 그래서일까, 종이 위에다 솔직한 마음을 적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적자니 또 오글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다시 곱씹어보며 스스로를 진정으로 바라보려 노력했다. 그녀는 이내 다짐한 듯 글을 적기 시작했다.


나는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오늘 아침엔 집에 있기가 싫어 무턱대고 나와 거리를 산책했다.

그때 나는... 도대체 무슨 감정으로 그랬던 걸까?

결국엔 학교를 지각하고 말았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땐 조금 부끄러웠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은 학원도 가지 않았다. 그냥 가기 싫었다.

그래도 서영이가 같이 뒷산에 가준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아마 서영이가 아니었으면 오늘 아저씨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학원을 가지 않아 방금 엄마한테 잔소리를 실컷 듣고야 말았지만...

하긴, 지각한 것도 모자라 마음대로 결석까지 했는데 당연하다.

그런데 신기한 건 오늘은 별로 슬프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그것도 정말 내가 서운해서 서운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달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아! 그리고 아까 아저씨가 준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보니 왠지 조금 슬퍼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활짝 웃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그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글을 다 쓰고 나니, 오늘 하루만 해도 갖가지 감정을 느꼈다는 게 조금 신기하면서도 섬뜩했다. 글만 보면 약간 미쳐있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유진은 마치 오래도록 가슴속에 틀어박혀 있던 공기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듯한 후련함을 느꼈다. 어딘가 먹먹했던 마음이 한 줄 한 줄 따라 풀려나간 그녀는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며 옅은 미소를 띠워 보였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향해 정말 오래도록 잊고 있던 눈빛으로 유진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볼품없고 어딘가 어색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토요일 아침, 유진은 여느 주말과 같이 이른 시간부터 스터디 카페에 나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서영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유진의 옆자리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오늘도 갈 거야? 그 사람한테?"


유진은 조금 뜸 들이다가 대답했다.


"응 가보려고."


"근데 그 노숙자 말이야, 글쎄 내가 보기에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오히려 멋있지 않아? 낭만적이고, 신비롭고..."


서영은 그에게 푹 빠져 버린 것 같았다. 심지어 그녀의 표정엔 동경마저 어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진 역시 요 며칠 새 그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왜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건지,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 건지, 그리고 정말 노숙자가 맞긴 한 건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느새 그가 진심으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때 서영이가 기어 다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오늘은 같이 못 가줘. 미안해..."


"왜?"


"오늘 동생이 생일이라 가족끼리 저녁에 외식하기로 했단 말이야."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유진은 내심 걱정했다. 혼자 가기엔 또 무서웠기 때문이다. 밤중에 뒷산을 혼자 걷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리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는 몇 차례 고개를 흔들고 나서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유진은 지난 이틀 동안이나 공부를 제대로 하질 못했기에 이번 주말엔 내내 흐트러져있던 시간을 만회하듯 그 공백을 메꿀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좀 늦더라도 최대한 해야 할 목록을 다 끝낸 뒤, 그를 만나러 가리라 다짐했다.


어느새 시간은 오후 6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때 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에게 손을 흔들며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난 이제 가 볼게. 행운을 빌어!"


"응. 잘 가."


서영이 떠나자 왠지 허전해진 유진은 말없이 다가오는 긴장감에 괜스레 숨이 막혀왔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일단 그녀는 마지막 남은 수학 문제 두어 개를 핑계 삼아 고민을 뒤로 미루었다. 그렇게 문제를 다 풀고 나니 어느새 한 시간이나 더 지나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지만, 유진은 지금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을 메어 스터디 카페를 나섰다.


해가 지자 거리의 불빛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가로등 아래 어둠이 한층 밝아졌고, 하늘엔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었다.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마음은 자꾸만 유진의 발끝을 붙잡았다.


'지금쯤 가면 아저씨가 있으려나...'


하지만 곧 이어지는 걱정이 머리를 짓눌렀다.


'혹시 없으면? 아니면 괜히 갔다가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가방 끈을 움켜쥔 손끝이 조금 떨렸다. 그때,


야옹!!!


"으악!"


담벼락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녀석은 순식간에 그녀를 향해 몸을 날리듯 덮쳐왔다. 때문에 유진은 깜짝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려 길바닥에 턱없이 내자 빠지고 말았다. 엉덩이를 바닥에 제대로 찧어 아파 죽을 것만 같았다. 앞을 째려보자 검은색 고양이가 그녀를 향해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어딘가 낯이 익는 고양이였다.


"어? 넌..."


유진은 곧 저 고양이가 저번에 서영이와 함께 공원으로 가던 중에 보았던 그 고양이였음을 눈치챘다. 무엇보다도 푸른 눈동자를 달고 있었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문득 유진은 그 노숙자가 떠올랐다. 그의 눈동자와 알게 모르게 닮아있었다.


야옹~


녀석은 꼭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내 어디론가 안내를 하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유진은 망설이다가 저도 모르게 고양이의 발걸음을 뒤따라 밟고 있었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나무들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스쳐갔다. 으스스한 기운이 그녀를 압도했다. 거의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분위기였다.


"하... 이게 뭐야."


유진은 자석처럼 고양이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뒷산 입구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숨을 내쉬었다. 고양이는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산속 깊이 들어가 몸을 숨겼다.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아저씬 왜 하필이면 이 시간에 꼭 이런 곳으로 초대를 하는 거야." 그녀는 반쯤 싫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왠지 지금 이대로 돌아가면 나중에 후회할 것만 같았기에 유진은 주먹을 불끈 쥐며 작은 결심을 꾹 눌러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어둠 속으로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디뎠다.


끼익- 끼익-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소리가 저번보다도 더 거슬리게 귀를 찔렀다. 유진은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최대한 소리 없이 조심스럽게 나아가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발소리는 오히려 더 또렷이 어둠 속에 번질 뿐이었다. 그녀는 마치 군인이 적진을 침투하듯, 시선을 초간격으로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샅샅이 살펴 걸었다. 저 멀리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꼭 어린아이가 절망하듯 울어대는 소리 같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였다. 유진은 자신의 발소리가 위쪽에서 나는 누군가의 발소리와 겹쳐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몸을 멈춰 세웠다.


끼익- 끼익-


맞았다. 다른 발소리의 주인이 있었다. 정체 모를 누군가가 점점 유진에게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유진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심장이 미칠 듯이 위아래로 쿵쾅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 가녀린 몸선이 하나씩 윤곽을 드러냈다. 어깨를 감싼 교복의 빛바랜 선과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치맛자락, 그리고 가만히 흔들리는 머릿결까지. 그녀는 마치 어둠을 뚫고 나타난 환영처럼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그것도 교복을 보아하니 같은 금호고 학생이었다. 유진은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안녕!" 그녀는 유진을 보자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넸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어. 아... 안녕?" 유진은 얼떨결에 같이 인사를 하고 말았다.


"우와~ 오늘만 두 번째 손님이네. 선생님 요새 잘 나가시는 걸. 너 지금 선생님 만나러 가는 거 맞지?"


"서... 선생님?"


유진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녀는 유진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가슴팍에 단 명찰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해원’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명찰의 테두리 색깔은 하얀색인 것으로 보아, 유진과 같은 고3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낯선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도, 이름을 들은 적도 없는 동급생이었다.


"음. 보아 하니 너도 선생님을 만난 지 얼마 안 됐나 보구나?"


"응?"


"걱정하지 마. 우리 선생님 좋은 분이셔. 아마 지금쯤 공원에 가면 계실 거야, 그럼 고생해~!"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나풀거리며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묘하게 가벼워 보였다. 바람처럼 휑 하고 가 버리는 그녀를 보며, 유진은 갑자기 피부에 닭살이 돋을 만큼 서늘함이 차갑게 시렸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서 걸음을 옮겼다.


eunduu_a_schoolgirl_seen_from_behind_wearing_a_traditional_scho_c6a270ca-3427-4b2e-8da0-749c4323c674.png





몇 분쯤 걸었을까, 아마 서영과 함께 왔을 때보단 한참이 걸렸을 것이다. 그제야 서서히 공원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자, 다행히도 아무 문제 없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는 일에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그가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달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일정한 박자를 두고 그네를 흔들고 있었다. 오늘도 크게 떠 있는 달이 차분하게 세상을 덮고 있었다.


"아저씨."


"어? 왔구나 키치!"


그는 이쪽으로 와 보라는 듯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유진은 그에게 다가가 곧바로 옆 그네에 털썩 몸을 실었다. 긴장이 확 풀린 탓에 제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오늘 생각보다 늦었네?"


"저 고3이에요." 유진은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보았다. 스터디 카페에서 나온 지 벌써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내가 준 선물들은 어때?"


유진은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하지만 막상 그에게 보여주려니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녀가 주저하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괜찮아. 부끄러울 수 있지. 때가 되면 보여줘."


"네... 근데 오늘은 왜 부르신 거예요?"


그는 말없이 그네를 흔들다가 유진에게 물었다.


"글을 적으면서 느끼는 게 좀 있었나?"


"조금 후련하긴 했어요. 그런데 거울을 보니 다시 슬퍼지더라고요.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환하게 웃어봤는지, 그게 잘 기억이 안 나요."


"걱정이 많지?"


"솔직히 성적 압박이 갈수록 심해져서 걱정이에요. 조금만 미끄러져도 기회가 날아가게 되니까... 그런 게 무겁게만 느껴져요."


"너는 대학을 왜 가려하지?"


"네? 그냥 일단 가는 게 좋잖아요. 의대 가면 그래도 나중에 먹고사는 데엔 지장은 없을 테니까..."


그러자 그는 유진을 잔잔하게 바라보았다. 그윽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는 어두운 밤 속 달빛을 품어 더욱 또렷하게 빛났다. 냉수에다 온수를 부은 듯, 유진은 그 눈빛을 보자 아늑하게 심장이 데워지는 것을 느꼈다. 바람 한 줄기가 서늘하게 불어와 그의 백발을 흩날렸다. 그 순간 그가 입을 떼었다.


"의사가 되고 싶어?"


"되고 싶다기 보단..."


유진은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사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의대에 가려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꼭 찾아야만 하는 걸까? 일단 가고 나서 생각해 보면 안 되는 걸까? 유진이 침묵으로 대답하자 그는 다시 달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기란 정말 어려운 법이지. 평생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혹은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게 태반이야. 그러나 이건 그 누구도 정답을 알려줄 수가 없어. 네가 가진 상황과 경험은 오로지 너만이 갖고 있는 거니까. 그래서 충고나 조언은 그 사람의 삶에 비해선 굉장히 가벼운 말들이 될 수 밖엔 없는 거야."


유진은 언뜻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는 것만 같았다.


"그럼 저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죠?"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나야 모르지~."


그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애초에 살아가는 데 정답은 없어. 그런데 오답은 있지. 그러니 무서운 거야. 무엇이 정답이고 무엇이 오답인지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야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거거든. 그런데 내가 말했잖아. 우리는 모두 키치일 수밖에 없다고. 그럼에도 선택은 너한테 달려있어야만 해. 대학을 가던, 가지 않던... 의대를 가던, 가지 않던... 무슨 일을 하든지 말이야. 다만 그건 알아둬. 너는 앞으로도 무수히 방황하게 될 거야."


따악-!


그때, 그가 손을 천천히 유진에게로 내밀더니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어둠 사이로 반딧불 한 마리가 날아와 그들의 그네 옆을 이리저리 맴돌았다. 그러자 또 한 마리, 그리고 다시 한 마리, 그렇게 작은 불빛들이 하나둘 모여들며 어두운 자리에 조용한 기적을 펼쳐냈다. 유진은 그 찰나의 침묵 속에서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조여왔던 족쇄가 사라지는 듯한, 알 수 없는 해방감이 그 안을 천천히 채웠다. 따뜻함이 고요히 번져가는 풍경. 그곳에서 유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을 삼키고, 살며시 노래를 뱉었다.













keyword
이전 04화유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