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년 이맘때쯤처럼 올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왔다. 목적지는 무과수님 덕에 알게 되어 꼭 혼자 오고 싶었던 부안의 스테이 변산바람꽃. 문을 열자마자 작고 아늑한 방에 따뜻한 조명과 잔잔한 노래가 메우고 있다. 집을 떠난 후로 여섯 시간 만에 도착하며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뚜벅이 여행자의 마음이 탁 놓인다. 이곳에서 지킬 두 가지 규칙을 세웠다.
1) 여기서 ‘-해야 한다’는 없다.
2) 보거나 듣는 외부 자극을 최소화한다. (인터넷, SNS, 하물며 책 마저도)
2. 뭔지 잘 모르겠는데 마음이 힘에 부치는 요즘이었다. 천천히 짐을 풀고 나니 다섯 시다. 아직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다가 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다. 사장님께선 오분만 걸으면 바로 바다가 나온다고 하셨다.
3. 바라를 보러 키 작은 집들 사이 골목을 천천히 걸어가는데 왠지 눈물이 찔끔 났다. 찔끔찔끔 눈물이 나게끔 그냥 두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찰나에 떠오르는 이유가 없는 걸 보면 굳이 지금 찾지 않아도 될 듯싶다. 자연스레 알게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도 좋고. 뭐든 눈물이 난다는 건 내 마음이 밖으로 꺼내어진다는 증거니 오히려 좋은 현상이라 생각했다.
4. 마지막 상담 이후로 내게 계속 남아있던 질문이 있다. “연희 씨는 왜 그렇게 무언가를 이루며 살아가려고 하는 걸까요?” 내 꿈을 이루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거기서 또 왜라는 질문을 던져본 적은 없었다. 그러게. 나는 왜 뭔가를 이루고 싶고 이뤄야 한다며 아등바등 살까. 이것도 어쩌면 강박일까. 요 며칠, 몸의 일부들이 자꾸 고장 나는 것을 보며 지금 내가 힘을 주어 애쓰고 있나 싶다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아픈 건 아픈 건지. 아픈 게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어떤 지표는 아닌 건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도 이럴 수 있는 건지. 조금 더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졌다.
6. 혼자 있어도 바쁘게 잘 노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다 우연히 나보다 조금 더 못살길 기대하고 있던 사람이 아주 잘살고 있는 모습을 SNS에서 봤다. 갑자기 마음이 확 답답해졌다. 인풋을 최소화하기로 했으면서 습관처럼 SNS를 들여다본 게 화근이었다. 아늑하다고 생각했던 방이 순간 비좁게 느껴져 숙소 앞 흔들의자에 앉았다. 이곳에선 별이 꽤 많이 보인다. 조금 쌀쌀했지만 차가운 바람에 마음을 따라 흘려보내며 하염없이 별을 봤다.
1. 일어나는 데 알람은 필요 없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우렁찬 닭 우는 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지는 새벽. 하루를 일찍 시작하고 싶긴 했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 이름을 걸고 부지런 떨기엔 이름값 못하는 여행이지 않나. 그만 울듯 계속 이어지던 닭 울음소리가 그치고 나서 다시 눈을 붙였다.
2. 오랜만에 느긋하게 아침 명상을 했다. 어젯밤에 마주했던 답답함이 다시 올라왔다. 처음엔 괜찮다고 말하려 했으나 이내 스스로 속이지 않고 더 날것의 문장을 가져가기로 했다. “나만 앞으로 못 나아가고 이대로 고여있는 건 아닐까 무섭고 슬프고 힘들었다”라고 말하자 또 눈물이 났다. 역시나 눈물이 난다는 건 좋은 신호였다.
3. 다 들여다볼 필요도, 다 흘려보낼 필요도, 모든 걸 비워내려고도 하지 않겠다. 순간이 다가오면 순간에 만끽하고 생각이 나면 생각하고. 읽고 싶으면 읽고. 모든 기준은 그 ‘순간’이다. 순간에 내 몸과 마음을 맡기자. 내맡기자. 흐름을 따르자.
4. 조식을 먹으러 공용 공간으로 갔다. 사장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커피와 샌드위치, 그리고 과일을 예쁜 트레이에 담아주셨다. 샌드위치에는 토마토가 들어가 있었다. 나는 원래 토마토를 안 먹지만 먹어보기로 했다. 여기서 경험할 수 있는 건 다 만끽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세상에!'를 속으로 외쳤다. 토마토가 들어 간 음식을 먹고 이렇게 맛있었던 건 생애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아름 언니랑 먹었던 라타뚜이, 그리고 이번. 문득 행복해졌다. 지금까지 그렇게 ‘나는 토마토를 싫어해요’라고 하며 안 먹었으나 막상 이렇게 먹어보니 정말 맛있었던 것처럼, 내 생각에 세상을 가둔 채 살았던 걸까. 토마토만큼 내 세계가 넓어진 행복한 경험.
5. 조식을 다 먹은 후 숙소로 돌아와 흔들의자에 앉아 바닷바람을 맞는다. 메모장에 짤막한 단상을 남기는 마음이 기쁘다. 손이 조금 시리지만 그런대로 정말 좋다. 외롭고 좋다. 외로운데 좋고, 좋아서 외롭고. 조금만 더 이 순간에 있다가 내소사를 가야겠다.
6. 버스 시간표에 맞춰 30분 거리에 있는 내소사를 다녀왔다. 바다 마을에 있다가 숲 속을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점심으로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식당에서 혼자 산나물비빔밥에 청국장까지 추가해서 먹었다. 진짜 맛있는 할머니의 밥상 같았다. 다시 돌아가려는데 버스 시간표를 잘못 봐서 거의 한 시간 반 가까이 시간이 떴다. 여기는 10분마다 버스가 오는 서울이 아닌, 시내로부터도 1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 동네. 서울에선 찾을 수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그동안 얼마나 빠른 속도로 살았던 건지. 마음을 놓으니 또 평소처럼 느껴지는 하루의 속도다.
7. 버스 시간표와 핸드폰을 여러 번 번갈아 보고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가, 또다시 시간표를 들여다보는 외국인 한 명이 자꾸 신경 쓰였다. 오지랖일까 아닐까 고민을 하다 결국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의 이름은 코야. 벨기에에서 왔고 한국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왔다고 한다. 산에 가는 걸 좋아해 혼자 하이킹 여행을 왔다. 그녀가 가고 싶어 하는 목적지에 가는 법을 열심히 알려줬다. 한국어로 이야기하다 한계가 있어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도 더 내 영어가 한참 달리는 걸 느껴서 당황했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게 아쉽다. 그녀에게 조금 더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8. 겨우 돌아온 내 집. 벌써‘집’이라고 부른다. 집이지 그럼, 내 집! 노래를 틀고 책상 앞에 앉아 밖을 본다. 메모장을 켜 대충 쓴다. 짧은 문장들로만 그저 의식이 흐르는 대로 쓰는 것도 좋다. 단순하게 표현해서 좋다. 굳이 길고 깊은 그런 글을 지금 은 쓰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또 쓰고 싶어서 이렇게 쓴다. 창밖으로 닭 한 마리가 돌아다닌다. 저놈 인가. 새벽에 우렁차게 울어서 나의 선잠을 깨운 놈이. 혼자 돌아다니다가 때 되면 다시 닭장으로 돌아간다던 닭이다. 자유를 만끽하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갈 줄 안다니, 진짜 현명하고 똑똑해.
9. 누워있자니 답답하고 아무것도 안 보자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이 자꾸 급해진다. 오기 전 축 처졌던 마음을 좀 더 정제시키고 가야 할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목적은 결국 '비움'이기도 하니. 그래도 마음을 몰아붙이고 싶진 않다.
10.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생각할 때 누군가의 구체적인 이름을 떠올리지 않겠다. J도, M님도, K언니도. 진짜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싶지? 그걸 상상해본 적 있나? 누구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서 빌려오는 ‘이미지’ 말고. 진짜 내가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는지.
11.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씩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모습. 공동의 목표를 가진 나의 동료들과 파이팅하면서도 나의 고유의 영역을 짓는 모 습(여전히 글과 관련한 콘텐츠를 다루지 않을까). 그게 분명한 가치를 담고 있는 모습. 느리더라도 조금씩 계속 커나가는 모습. 내가 나의 일에 자부심이 있는 모습. 일 속에서 삶이, 삶 속에 일이 있는 모습. 내가 믿는 가치를 글로 설득력 있게 잘 전달하는 사람.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고도 원하는 나의 모습이다.
13. 흘러가는 시간에 벌써 여행의 반이 지나고 있다며 초조해지는 마음을 몇 번이나 내려놓고 생각 스위치를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오늘 밤은 규칙을 살짝 옆으로 밀어 두고 맥주 한 잔 마시며 정말 좋아하는 영화 <작은 아씨들>을 다시 볼 거다.
1. 어젯밤 고민거리들을 느슨하게 정리했더니 마음의 조급함이 꽤나 줄어들었다. 다시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맞다는 직관의 확신. 이게 아닌가 하고 들여다보러 왔지만, 다시 봐도 이게 맞았고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크게 가지고 왔던 세 가지 꼭지의 고민을 어느 정도 정리해볼 수 있게 됐다. 다행이고 다행이다.
3. 좋을 땐 한없이 좋다가도 외로울 땐 한없이 외로워지는 게 혼자 여행이다. 하루 내 혼자여도 너무너무 행복하고 괜찮은 순간이 있고 혼자여서 너무 외롭고 쓸쓸한 순간이 있었다. 3일 내내 그랬다. 나의 외로움까지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고 싶다. 매일 찾아오는 내 감정, 반갑진 않더라도 적어도 불청객은 아닐 수 있게끔, 묵묵하게 곁을 내어주자. 애써 괜찮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나 외롭다! 고 있는 그대로 내뱉어도 된다. 그러지 않을 이유는 뭐 있지? 그냥 내 감정의 일부인데.
4. 밥을 일찍 먹으려다 아끼는 저녁 산책을 놓쳤다. 오늘은 안개가 많이 껴서 어차피 산책하러 나갔어도 선명한 노을은 보지 못했을 거라 스스로 위로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갈까 말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인의 방 앞에서 한참을 주춤거리며 서 있었다. 그사이 해는 저 멀리 넘어갔다. 그 순간을 붙잡지 못하는 아쉬움에, 해가 지니 나의 마지막 하루도 끝난 것 같은 공허함에 방에도 들어가질 못했다. 그러다 또 문득 내가 언제 또 이 감정을 이렇게 느껴본다는 말이냐 - 하고 실 없이 웃어보았다. 그러자 아쉽기만 했던 그 순간이 아주 조금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5. 마지막 밤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그렇단다. 혼자 아침 산책을 하며 바다 윤슬을 볼 때는 혼자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하다가도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밀고 들어온 마지막 노을에 이 마음을 혼자서 어찌할 줄을 몰라 또 너무 외롭다. 그러다 문득 이 방을 거쳐 갔을 수많은 ‘혼자’가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굴도, 이름도,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는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싶다. 누 가 올지, 누가 이 글을 읽을지 모르겠지만 문득 외로움을 느낄 다음 여행자에게 나도 그랬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하는 나의 말이 어색한 위안이나마 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 시인의 방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적고 간 노트를 펼치고 펜을 들었다.
1. 날이 흐리다. 마지막으로 쨍한 햇빛을 보지 못한 게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조식을 기다리며 바다를 보고 앉아있자니 또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흐린 날의 도시는 너무 우울했는데 흐린 날의 자연은 그냥 흐리구나. 다양한 날의 변산바람꽃을 보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1년의 하루하루가 궁금해졌다.
2. 아직 아침을 밖에서 먹어도 괜찮은 날씨라 다행이다. 이렇게 느긋하고 아무 생각 없이 바다를 보고 커피 마시면서 아침을 먹는 순간에 충실했다. 그 자체로 힐링이었다. 별거 아닌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게 되게 좋구나. 주중엔 힘들더라도 주말에는 꼭 이렇게 먹는 순간에만 집중해보자고, 변산바람꽃에서의 아침을 나의 일상 속으로 가져가 보자고 다짐했던 조식 시간.
3.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보았다. 무슨 인상주의 마음인가. 충만한 마음도, 텅 빈 마음도, 눈물이 차오르는 기쁨도, 세상 혼자인 것 같은 외로움도 그 저 순간이었다. 무엇하나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니 결국 평온하지 않을 이유가 없구나. 다 지나가는 감정이니 말이다. 부안시외버스터미널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문득 내린 여행의 결론이었다. 이거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4. 쉬는 연습을 했다고 생각하련다. 뭐든 연습이라 생각하면 그 자체로 만족스럽다. 앞으로의 날들도 그저 연습이라고 생각했으면. 혼자만의 시간을 멋지게 만끽하는 여행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외로운 여행이었다. 완벽하게 쉬지도 못하고 마음을 가라앉히느라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지만 지나고 보면 또 그저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조차도 나다운 여행이었다. 불완전하게 완전했던 나 홀로 부안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