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옛날 생각이 났나봐.
온기를 담은 만큼 무거워진 공기가 차분히 내려앉는다. 흐린 하늘덕에 햇빛이 방 안을 밝게 비추지는 않지만, 추위가 한 발자국 물러난 아침이다. 할머니들을 뵈러 일찍부터 움직여야 하는 날, 적당한 시간에 집으로 오라던 어머니의 말에 맞춰 느긋이 출발 준비를 한다.
"누나, 엄마 기분 안 좋던데. 이제 출발한댄."
"내 차로 이동하려던 거 아냐?"
먼저 부모님 댁에 들른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차 한 대로 이동해도 충분하기에, 아버지가 타고 내리기 편한 내 차를 이용하기로 했었건만, 어머니가 내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출발하려 한단다.
"엄마, 나 금방 가는데."
"네가 늦게 오니까 그렇지."
"8시에서 8시 반 사이에 나 편할 때 오라며."
"막내가 먼저 왔잖아!"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어머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내가 어머니께 잘못한 일은 없다. 전날까지도 오늘 일정에 대해서, 다음날 아버지 병원 진료에 대해서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었었다.
"나 뭐 엄마한테 잘못한 거 있어?"
"없어."
"그럼 내 차로 같이 가."
"아침부터 살 것도 많은데, 뭘 또 기다려. 넌 김밥이나 사와."
뚝- 전화가 끊긴다. 아마 어머니, 아버지보다 늦게 도착한다면 더 크게 터져 나올 분노가 예상된다. 까닭을 알 수는 없지만, 어버이날. 갈등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 조금 서두르며 시간을 재촉한다.
남동생으로부터 카톡 하나가 도착한다. 새벽, 어머니가 남동생에게 보낸 "아침에 아빠에게 카네이션 줘라."라는 메시지가 보인다. 하지만 평소처럼 누나들이 챙길 테니 별생각 없이 빈 손으로 갔단다, 아마 이것 때문에 어머니가 화가 나신 것은 아닐까. 추측이 함께 남겨져 있다.
엄마, 카네이션은 손주 둘이서 함께 갖다 줄 거야- 조금 늦게 받아도 이해해 줘-
이미 어머니에게는 말을 해 두었었다. 요즘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이 넘쳐나는 손자가 들고 간 카네이션이 더 큰 선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었는데. 무언가 잘못 판단한 모양이다. 여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상황을 설명하니, 그럴듯한 추측을 내놓는다.
"할머니한테도 엄마, 아빠랑 손주들이랑 다 따로 꽃 선물 했었잖아. 그거때매 그러는 거 아냐?"
작년에 손자 손에 들려있는 카네이션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었다. 그런데 1년 사이에 또 생각이 바뀐 건가. 복잡한 감정 속에서 작은 짜증까지 밀려온다.
도착한 후, 마주한 남동생의 표정이 좋다. 언니가 영상 통화로 손주 얼굴을 보여주며, 직접 찾아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단다. 화면 속 손주가 방긋방긋 웃는 모습에 기분이 사르르 풀렸다. 역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손주가 최고다.
어제 새벽, 잠들지 못했던 아버지가 떠듬떠듬 단어들을 이어가며 어머니에게 말을 꺼냈다. 아직 어린 손주를 데리고 언니가 오지 못할 테니, 남동생에게 작은 카네이션 한 송이라도 아버지께 건네드리고 싶었던 마음이었을 텐데. 속상함이 분노로 이어진 모양이다. 뜬금없던 아침의 소동이 이해가 간다. 다 큰 자식들, 예쁜 손주들이 있어도 아픈 아버지가 어린 시절의 자식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모습에 어머니 마음이 아린 탓이었겠지.
할머니에게 음식을 올리고 절을 한다. 산에 올랐건만, 꽤 따스해진 공기가 피부를 간질인다. 손바닥 밑으로 짓눌렸던 풀잎들이 천천히 다시 고개를 들고 제 모습으로 자리 잡는다. 때론 부딪힐지라도, 늘 이렇게 평온하기를. 이런 일상들이 이어지기를. 그리고 할머니도, 그곳에서 편히 쉬고 있기를. 바라는 것이 참 많은 날.
어버이날, 사랑한다는 말을 비겁하게도 조카를 통해 대신 전달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