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전해지는, 그 사랑처럼
도로 위에 파도가 친다. 쓸려나가다 밀려오는 하얀 물결이 거칠게 검은 바탕을 채색한다. 내려앉은, 내려앉기 전의 눈송이들이 바람에 끌려다니며 여러 무늬를 만들어낸다. 천장을 두드리며, 싸라기눈과 바람이 함께 불규칙한 화음을 연주한다. 토도독- 눈이 부딪히는 소리가 줄어들며 바람 소리만 남아 있다. 어느덧 함박눈으로 바뀌고 큰 눈송이가 차창으로 달려든다. 차를 뒤흔드는 바람소리가 모든 것을 묻어버린다. 만약 눈을 감는다면, 눈의 존재감이 지워진 채 바람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퇴근길에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힘없는 목소리는 눈에 대한 걱정을 묻어 버린다. 오늘 산부인과에 다녀온 동생의 걱정이 목소리에 잔뜩 배어있는 탓이다. 며칠간 배의 통증이 느껴져 조산 방지제를 처방받았단다. 아직 예정일까지 두 달 정도 남았는데, 아직 아가가 2kg도 되지 않았는데. 조리원에서 지낼 기간 동안 눈에 아른거릴 첫째를 걱정하던 동생은 이젠 입원에 대한 걱정을 드러낸다. 아빠가 재택근무로 전환한다 하더라도, 엄마와 떨어져 있는 외로움을 길게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은 엄마의 걱정이다.
"오늘 애기 좀 봐줄 수 있어?"
여느 때라면 '함께'라는 단어가 붙었겠지만, 오늘은 '부탁'으로 바뀌었다. 며칠간 몸을 좀 쉬어 주면서, 자궁이 수축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테다.
거칠게 열리는 문소리를 들은 조카가 미리 문 앞으로 달려와 있다. 한순간 강하게 불어온 바람에 문을 놓치며 발목 뒤편을 스쳐버린다. 통증에 입술을 깨물지만, "니모! 미모!"라며 안아달라 손을 뻗는 조카를 먼저 안아 든다. 한동안 '이모' 발음을 잘하더니 요즘에는 또 발음이 달라졌다. 그래도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이모의 즐거움이지만.
상처가 욱신거린다. 양말을 내려 살펴보니 껍질이 까져있다. 왠지 많이 아프더라니만, 동생네 집 약통에서 연고와 밴드를 꺼내 응급처치를 한다. 사라진 이모를 찾던 조카가 가까이 다가와 빤히 바라본다.
"이모 아야 했어, 여기 아야."
"아야. 아야."
밴드를 붙이는 것까지 빤히 바라보더니만 입으로 호-부는 시늉까지 해 준다. 언제 이렇게 큰 거지. 조카를 안아 들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잔뜩 뽀뽀 세례를 쏟아붓는다. 함께 장난감을 같이 가지고 놀다가 입이 심심한지 계속해서 과자를 찾는다. 문제는 과자를 입에 물었다가도 계속해서 뱉는 것을 보니, 먹고 싶진 않은 듯한데. 손에 든 과자를 할머니 손에 쥐어주고 새 과자를 꺼내달라는 요청에 '안돼' 한 마디를 했더니 울음이 터져 버렸다. 안아 들고선 토닥이지만, 이젠 온몸으로 울어대는 녀석을 달래는 일은 쉽지 않다. 짧은 울음이 끝난 뒤, 금세 기분이 좋아진 듯 이모 손을 붙잡고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제가 구석구석 숨겨놓은 장난감들을 자랑하기 위함이다.
"너무 예쁜데, 요즘은 너무 힘들어."
첫째가 너무 예뻐, 둘째를 마음먹은 동생은 요즘 힘듦을 자주 토로한다. 만삭의 몸에 행동도 동작도 커지고, 활발해진 첫째를 따라다니는 것이 쉽지 않은 탓이다. 어린 나이에도 동생이 생긴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인지, 질투나 애정을 요구하는 행동들이 늘어났다. 이모나 아빠와 잘 놀다가도 꼭 엄마를 보러 가야 하는 것처럼, 가끔 더 어린애처럼 작은 투정들이 늘어나는 것처럼.
누워 있는 엄마가 보고 싶었는지 큰 소리로 '엄마!'를 외치며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엄마 자장하네-' 이모의 말에 조카는 이불 너머로 엄마에게 자장자장, 소리를 내며 엄마의 어깨를 토닥인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어 엄마에게 뽀뽀를 해 준 뒤에 이모 손을 잡고 다시 거실로 놀러 나간다. 여동생은 그런 조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가 만연하다. 그래, 힘들겠지. 많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지.
"안자. 안자."
제 옆에 앉으라며 손짓을 하던 조카는 이모가 자리를 잡자 양말을 쑥 내린다. 밴드를 붙인 부위를 확인하더니 다시 호- 부는 시늉을 반복한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음이 만개한 녀석을 품 안에 힘껏 껴안는다. 꺄르륵 웃던 조카는 품에서 벗어나 제 방으로 달려가버린다. 이모 아픈 것도 기억해 주고, 또 슬쩍 아픈 것을 달래주기도 하고. 울음과 짜증들이 늘어난 우리 찡찡이의 사랑은 그렇게 조용히 전해진다. 순간마다, 사이마다, 녀석은 큰 사랑을 조용히 전해주곤 도망을 가 버린다.
조카가 잠드는 시간,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골목에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간간히 창틀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눈이 내린다는 사실마저 묻어버렸다. 어둑한 골목, 흰 눈이 빛을 발한다. 바람소리에 묻혔던 눈이 그제야 제 존재감을 조용히 드러낸다. 그래, 분명 드러나지 않아도 존재한다. 조용히 전해지는, 그 사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