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게 말했지만, 쌤도 벌레가 너무너무 싫다, 정말.
"화장실 다녀올게요. 저 근데 오래 걸릴 텐데."
"괜찮아. 못한 건 오늘 쌤이랑 남아서 하면 되지."
"빨리 갔다 올게요!"
다급하게 달려온 학생은 뿌듯한 표정이다. 저 많이 안 늦었죠?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보여주니 시무룩해진다. 15분 지각이다. 오늘은 월말평가를 보는 날. 교실에 들어서며 발을 동동거리던 아이가 화장실에 다녀오며 꽤 수업이 지체되었다. 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얼굴에 잔뜩 심통이 올라왔다. 네 마음은 알겠다만, 쌤이 널 공부시켜야 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가 없는데.
"오늘 이거 다 풀고 틀린 것만 고치면 끝나거든? 다 하면 안 남아도 돼."
"진짜요?"
"응. 대신 이거 성적표 엄마아빠한테 가는 거니까, 빨리 풀다가 다 틀리면 안 된다."
평소보다 손에 쥔 연필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빨리 풀기도 해야 하고, 점수도 잘 나와야 하고. 급해지려는 마음을 꾹꾹 한 글자씩 눌러쓰며 심혈을 기울인다. 열심히 푸는 모습이 기특하다만, 엉뚱한 곳에서 개념을 혼재하는 아이라서 걱정이 밀려온다. 쌤이랑 공부했는데 점수가 처참하면, 너도 속상하겠다만 쌤도 눈물 나.
"아. 선생님. 근데 저 화장실에서 아까 충격적인걸 봤어요."
"뭘 봤는데?"
"그거요..... 까만 거.... 바퀴벌레! 으악!"
작은 호들갑이 더해지며 아이는 깜짝 놀란 시늉을 한다. 아이고, 또 나왔구나. 아래층에 식당이 있는 데다 주위에 식물들이 많은 지역이다 보니 벌레가 꽤 잦게 출몰한다. 아이들도 학교나 운동장에서도 자주 마주친 덕분인지, 이젠 꽤 익숙하게 고이 싸서 방생하는 수준에 이르렀건만. 바퀴벌레는 논외다.
"여기 주변에 식당도 많고, 나무나 풀도 많지?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벌레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어."
"그러면 민달팽이도요?"
"응. 쌤네 집은 바퀴벌레보다 달팽이가 더 많이 나와. 너무 싫어."
"우리 집도 달팽이랑 바퀴벌레랑 나와요."
학원 가까이에 사는 아이라서 가벼운 설명에도 납득을 해 준다. 아파트나 고층 빌딩의 위쪽에서는 벌레나 곤충들이 거의 없다고 하는데. 단독주택의 가장 큰 복병은 역시 이런 녀석들이다.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단독 주택에서만 살아오며 익숙해졌다만, 대체 달팽이는 어디서 나오는 거람. 하수구 구멍들을 막아 두어도, 그 느린 몸체로 2층까지 기어 올라와 존재감을 드러낸다. 모르고 밟기라도 했을 때는. 아이의 말 덕분에 그때의 감각이 올라와 작은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지나간다.
빨리 안 풀면, 오늘 남는다? 그제야 다시 열심히 손을 움직이며 문제를 또박또박 읽어 나간다. 끝나기 5분 전, 다 풀었다며 의기양양하게 내미는 시험지를 채점한다. 빨간 펜의 움직임에 미소를 짓다가도 절규를 하다가도, 생각보다 많이 그어진 동그라미에 아이와 나 둘 다 놀랐다. 국어는 2개를 틀리고, 사회와 과학은 100점. 내 예상보다도 더 높은 점수에 잔뜩 칭찬을 건네준다. 신이 난 아이의 어깨가 쑥 올라간다.
"그런데요. 선생님네 집도 벌레 많이 나오면, 지네도 나와요?"
"아니. 다행히 지네는 안 나와."
"우리 집은 지네 100마리 나와요. 막 자는 방에서도 나와요."
"100마리가 나오면, 너 지네랑 같이 자는 거야?"
"그게 뭐예요! 지네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아, 멍멍이 못 키우니까 대신 반려 지네 키우는 거야?"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얼굴에 웃음이 가득 피어난다. 그런 장난이 재미있었는지, 저 혼자 큭큭거리며 웃느라 가방을 챙기다가도 바닥에 떨어트려버린다. 다음 강의실로 들어가는 녀석의 뒤를 따르며 선생님에게 장난을 함께 건넨다.
"쌤, 00이는 지네랑 같이 잠을 잔대요. 반려지네 100마리를 키운다네요."
부정하는 아이의 목소리에 웃음과 장난기가 가득하다. 선생님도 그 반응이 귀여운지 똑같이 다시 장난을 건네는 소리가 들려온다. 종종 수업 중에 아이의 말에 장난을 더하곤 한다. 실수를 할 때마다, 혼을 내며 지적하기보다는 함께 웃어보려는 의도다. 싫어하는 아이들은 질색을 한다면, 요 녀석은 그런 장난을 쳐 줄 때면 며칠 내내 자기가 먼저 그 말을 다시 꺼낸다. 유치하지만, 이런 데서는 잘 맞는 선생과 제자다.
화장실로 가 보지만, 이미 숨어버린 바퀴벌레는 보이질 않는다. 음, 그런데 요 옆에 사는 아이네 집에 지네가 나올 정도면 여기도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닌가. 우리 학원 벌레잡이 담당이던 아이가 있던 시기에는 걱정이 없었는데, 이젠 졸업을 해 버렸다. 바퀴벌레까지는 슬리퍼로 어찌어찌 처리가 가능한데, 진짜 지네가 나오면 어쩌지. 부디 지네가 '자주' 나온다는 아이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라는 날. 덤덤하게 말했지만, 쌤도 벌레가 너무너무 싫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