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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3 유족입니다.

쌤은 한강 작가가 정말 고마워.

by 연하일휘

열 살 남짓한, 작은 여자아이가 제 엄마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 밑창이 달아버린 신발은 걸음마다 바닥에 끌리는 자국들을 흔적으로 남긴다. 아픈 발보다도 비어있는 뱃속이 괴롭다. 배고픔을 호소하며 칭얼대지만 어머니의 입술이 굳게 닫혀있다. 눈물도, 서러움도 삼킬 수밖에 없다. 아빠는? 오빠랑 언니들은? 질문에 어머니 눈가에 맺힐 눈물방울이 무서워 작은 입을 꼭 다문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그 작은 아이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다.


한 아저씨가 아이의 어깨를 두드린다. 아저씨는 수척한 얼굴로 작은 미소를 건넨다. 투박한 주먹밥, 간조차 되어 있지 않은 찬밥 한 덩어리를 아이의 손에 쥐어준다.


"속암져."


거친 손바닥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눈물이 배어있는 목소리가 전해주는 '고생한다'라는 한 문장. 입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밥알들의 단맛이 수십 년이 지나도록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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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삼춘 찾아보젠 해신디, 못 찾았주."


담담하지만, 아련함이 깃든 목소리가 뒷좌석에서 들려온다. 고향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한적한 시골길에 접어들며 할머니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 주었다. 전쟁통이었을까, 혹은 4.3 사건 당시였을까. 맞장구만 치며 듣던 그 이야기의 배경은 종이 한 장에 적힌 이름을 발견했을 때, 알게 되었다.


[4.3 사건 희생자 유족]


"다 빨갱이들이 일으킨 사고야."


어릴 적부터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적이면, 아버지는 단호하게 한 문장으로 사건을 일축했다. 대학에 가며 4.3 사건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난 뒤, 아버지의 말과는 달리 '학살'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대화를 해 보아도, '빨갱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4.3 사건에 대한 말을 피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아버지와는 말이 안 통한다며 더 이상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을 때쯤, 작은 진분홍빛 카드를 받았다.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4.3 유족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가족들로부터, 친척들로부터 주입과도 가까운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을 것이다. '빨갱이'라는 단어로 가족의 희생을 숨기고 또 숨겨야만 제주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4.3 사건의 희생자들의 유족들은 '희생자'가 아닌 '빨갱이'의 낙인이 찍혔다. 아버지에게 4.3 사건이란 '빨갱이'라는 단어로 자신과 분리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것이 살아남기 위한 방안이었다.



ⓒ 연하일휘



"사이렌 소리 들었어?"


4월 3일, 오전 10시. 4.3 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묵념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주민센터 바로 뒤편에 살고 계신 어머니는 소리가 크다 못해 찢어지는 듯이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다급히 창문을 닫았다는 말을 한다. 아마 먼 곳까지 들리게 하느라 그랬나 보네- 주민센터가 가까워 편리하긴 하지만, 안내방송도 웅웅 거리는 통에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며 작은 하소연을 전한다.


출근 후, 수업에 들어가며 아이들에게 질문을 건넨다.


"얘들아, 오늘 묵념했니?"


"아뇨. 사이렌 소리 아예 안 들렸어요."


"그럼 4.3 수업은 했어?"


"했어요."


"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꽤 놀랐던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심드렁하다. 아이들에게는 공부거리가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점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쌤은 한강 작가가 정말 고마워."


"'작별하지 않는다'때문에요?"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시험 범위였었다. 함께 작품을 공부하며 5.18 민주화 운동을 접한 덕분에, 이번 계엄령 소식에 아이들도 잔뜩 긴장을 했었다. 주인공인 '동호'가 아이들의 또래였기에, '계엄령'에 대한 두려움을 표한 아이들도 있었다. 그 작품을 공부하며, 글자들로만 받아들였던 역사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 아이들은 현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 한강 작가에게 고마운 것은 그러한 거창한 역사의식이나 직업의식 덕분만은 아니다. 단지 개인적인 사유다.


"쌤이 4.3 유족이라서."


여전히 다른 지역에서나, 제주도 내에서도 4.3 사건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말해준다. 학교에서도 공부하고, 텔레비전에서도 종종 나오는 사건인데 여전히 '빨갱이'라는 단어가 덧붙는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꽤나 놀라워한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4.3사건에 대해 설명한다던가, 왜곡에 맞서 나선다던가. 그런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는 않는다. 4월이 되면, 아이들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정도의 수준일 뿐이다. 그런 내가 4.3 희생자 유족증을 받아도 되는걸까. 당연하겠지만 얼굴조차 모르는 친척일 뿐인데,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닌데.


다만 내가 4.3 사건의 유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의 삶과 할머니의 삶의 단면을 엿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팠을 시간들이 왜곡되는 것이 안타깝다. 그 아픔들이 다른 명분들 하에 덧나지 않기를, 그저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할머니가 만났다던, 그때 그 삼춘은 어찌 되었을까. 아픔 속에서 주고받던 작은 인정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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